100일 도전 성공
웹, UI, UX 디자이너 그리고 최근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타이틀은 바뀌었지만 IT 산업의 디자이너로 20년 넘게 일해왔다. 내 직업은 디자이너였고, 다음 직업도 의심 없이 디자이너였다. 그러던 내가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았다.
시작은 부동산 투자 공부
부동산에 관심 없던 사람이 유튜브 영상을 보고 투자에 관심 갖게 되어 강의를 듣고 투자를 시작하게 되는 건, 딱히 어떤 서비스임을 말할 필요 없이 흔한 스토리다. 나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월급을 펑펑 쓰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던 참에 부동산 관련 영상을 보게 되어 강의를 듣고 임장을 다니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부동산은 참 낯설었지만 내가 모르던 세상을 하나둘 알아가는 게 재밌기도 했다. 회사의 불안한 경영 상황은 부동산에 대한 관심에 불을 붙여 정말 열심히 배웠고 커리큘럼을 따라갔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걸리던 시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부 임장.
조용히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는 것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사지도 않을 거면서 남의 집에 들어가 중개사와 집주인의 시간을 뺏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살 결심이 들었을 때야 집을 보기 시작했다. 다만 부동산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가격이 상승하던 시점이라 선뜻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여러 집을 봤음에도 결정을 못 내리니 괜히 더 죄송해지던 참에 중개사 님께선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 직업이 참 좋아요. 15년 동안 했어. 맨날 집에 있다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 이거 한 번 해봐요. 잘할 것 같아. 누가 봐도 딱 지금 공인중개사 같아."
최강 I 인 나에게 공인중개사라... 그래요? 하고 웃고 넘겼지만 집에 와서도 그 울림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내가 공인중개사?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공인중개사는 사람을 직접 상대해야 한다. 회사 안에서의 갈등도 힘든데 매일매일 낯선 사람을 상대하고, 설득해 계약을 이끌어내는 그 직업??
'못해. 못해.'
'아니야, 디자인도 그냥 시작했잖아. 중개업도 그냥 시작해서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고민.. 또 고민...
그러다 질렀다. 디자이너로 취업이 힘들면 포트폴리오를 다듬으며 더 도전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안엔 다른 일을, 내 삶과 더 연관이 있는 일을 해 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쉽지 않은 시험 준비
시험까지 4개월도 안 남은 시점, 시행착오를 거쳐 함께할 인터넷 강의를 찾긴 했다. 그리고 한 이틀 지난 후, 꽤 큰 규모의 회사 HR에서 지원해 보라는 연락이 왔다. 당장의 밥벌이가 중요하기에 바로 시험 준비를 중단하고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만들어 지원했고 시원하게 떨어졌다. 그때 만들어둔 포트폴리오 덕에 지금 부담은 없지만, 2주의 시간을 썼고 정확히 7월 21일에 다시 시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험에 대해 어떤 정보도 없던 상황에 좋게 말하면 순진했고, 안 좋게 말하면 멍청했다. 6과목이니 넉넉히 나눠서 시험 때까지 강의만 들으면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그러나 관련 카페에 가입해서 정보를 보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방대하고 깊이 있는 내용에 쉽지 않은, 아니 매우 어려운 시험이구나 라는 게 실감이 되었다.
강의 듣는 시간을 늘리고 전체적인 계획을 다시 세웠다. 정보가 부족했기에 유튜브 등을 통해 남은 3개월의 시간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계획을 짰다. 그리고 시험날까지 하루도 빼지 않고 계획대로 준비를 했다.
공인중개사 시험 어려울까
각자의 베이스가 다르기에 속단해서 말하긴 힘들다. 다만, 법과 경제에 무지한 나 같은 사람에겐 너무나 어려웠다. 법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고, 그렇게 많은 법조문을 공부해야 할지 몰랐다(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수 있다). 그리고 상식으로 생각해선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너무 많아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다행히 에너지 넘치는 교수님들의 강의는 온라인 상이지만, 힘들고 지치던 내 삶에 에너지가 되어 주셨고 당락과 상관없이 그분들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배운다는 게 재밌기도 했다.
꾸역꾸역.
6과목의 이론을 끝내고 이론을 또 듣고, 문제를 풀고 또 풀고... 모든 수험생들이 하듯이 지난한 과정을 반복했다. 환상적인 가을 날씨에 특히 힘들었지만 시험에 몰두할수록 이전의 직업과 멀어지기에 더 간절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그래서 결과는요?
시험은 너무 어렵게 느껴졌고, 잘 본 건지 못 본 건지 예측하기 힘든 문제들이 많았기에 멍하게 나왔다. 그리고 집에 와 채점을 하니 점점 늘어나는 동그라미에 희망이 보였다. 긴장했던 1차 민법 외 여유로운 점수로 합격 예상이다. 오래 준비하신 분들이 많아 감히 그동안의 힘듦을 운운하기엔 가소롭지만, 아이 챙기는 시간 외엔 모든 걸 끊고 올인한 결과가 좋아 정말 기뻤다. 무엇보다 웃을 일 없는 우리 집에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공인중개사 왜 하냐고, 이전처럼 알만한 회사의 디자이너 엄마를 기대하던 아이마저 손뼉 치고 좋아하니 그동안의 노력이 이보다 가치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엄마의 노력이 좋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이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았을지, 또 앞서 가본다.
어쩌다 보니 단기 합격 수기가 되어 정말 간절하게 준비하시는 분들께 상처가 될까 조심스럽기도 하다. 다만, 아이가 많이 커서 등하교 라이딩 외엔 딱히 시간 쓸 일이 없었고, 살림도 내려놨었다. 그만큼 종일 시간을 쓸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처음 시작할 땐,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에 대해 내가 도전할 수 있을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걸 고민하게 되었다. 활발하지 않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도 못하지만, 진중함을 강점으로 나만의 콘셉트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그러나, 아직은 디자인 일을 더 하고 싶어 부동산 관련 디자인 직무를 찾고 있다. 급하진 않기에 천천히 생각하려 한다.
결론은, 인생은 참 재밌다는 것. 집 보러 갔다가 사장님 한 마디에 삼 개월간 모든 걸 다 끊고 시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기회는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른다.
내 다음 챕터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연말까진 쉬면서 고민해 볼 생각이다. 공인중개사로 제2의 삶을 살지, 아니면 디자이너로서 마지막 커리어를 쌓고 있을지 나도 모르겠지만 무엇을 선택하던 재밌을 것 같다.
시험 준비하신 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