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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Dec 28. 2017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회자되는 이유

<천공의 성 라퓨타>(1986)을 중심으로

2020년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단편영화를 들고 다시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 주인공들이 모두 사람이었던 반면,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송충이를 닮은 벌레이다. 최근에 공개된 제작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오듯이 이번 영화는 2D 셀 애니메이션이 아닌 3D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다. 고작 벌레 영화가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할 수 있겠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와 이 영화의 개봉 시기가 도쿄 올림픽 개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의미심장하다. 은퇴를 몇 번이나 번복해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번에 굳이 돌아오게 된 이유는 아마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해서가 아닐까라고 추측해본다. 모든 예술작품에 정치적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예술작품이 잘 만들어지면 그 어떤 기사와 다큐멘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동안만큼은 스토리에 집중하게 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알레고리적 영화에는 그런 힘이 있다. 영화 <바람계곡 나우시카>(1984)부터 나타나는 자연과 문명의 충돌, 여성, 그리고 선과 악의 모호함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까지 반복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주제의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은 영화 플롯뿐만 아니라 그의 애니메이션 작화에서까지 드러나기 때문에 완벽하다.


모호함

이 세계에는 악당이 있고 우리 편에 있는 선택받은 자가 그 악당을 클리어하면서 해피엔딩을 맞는다.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퍼시 잭슨, 해리 포터, 헝거게임… 수많은 시리즈가 이 내러티브를 따른다. 대중문화가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만큼 우리의 삶도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이러하다. 확실히 목적을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방해 요소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모범적 삶인 듯하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이런 내러티브 공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세계에는 편가르기가 없고 인물이 하는 행동의 목적도 뚜렷하지 않다. 물론 <천공의 성 라퓨타>(1986)의 주인공 ‘시타’도 선택받은 자이다. 그녀에게는 어머니가 물려준 비행석이 있고 라퓨타 왕족만이 그것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시타 말고도 라퓨타 왕족은 있으니 그것이 무스카이다. 그래서 우리는 라퓨타 왕족이 도대체 선한 사람들인지 악한 사람들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하늘 위에 떠있는 라퓨타 성도 마찬가지이다. 성의 윗부분은 자연과 라퓨타 왕족이 만든 로봇이 자연을 보호하고 있다. 한편 성의 아랫부분은 같은 로봇이 수류탄을 연상시키는 살인 병기 형태로 대기하고 있다. 처음에 각종 폭력을 쓰면서 시타를 납치하려는 해적단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초반에는 야만적인 악당으로 보이는 이들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모두 사회로부터 외면받는 소수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적의 대장 ‘도라’는 여성이고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남자들은 핑크색 바지 차림에 통념적으로 ‘남자답지’ 않은 남자들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유색인종도 보인다. 그들이 탄 해적선을 운전하는 사람은 노인이다. 해적단은 보물과 식량을 훔치는 집단이지만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는 집단이다. 해적단과 똑같이 군대와 정부도 보물을 노리지만 그들을 범죄자로 몰면서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한다. 이런 모호한 인물 설정은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모노노케 히메>의 에보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황야의 마녀가 있다. 모호한 캐릭터 설정은 극 중 긴장감을 형성해서 극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특히 <모노노케 히메>에서 멧돼지, 들개, 시시가미, 그리고 주인공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모호함이 관객에게 주는 공포감은 상당하다. 미야자키의 영화는 주로 그의 이상을 나타내면서 끝내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갈 수 있지만, 극장 밖으로 나올 때 각자 수수께끼 하나가 주어진 것처럼 알쏭달쏭하다. 사실 변명에 변명을 더하면 모두를 피해자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사고방식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판타지적 요소가 이들의 모호함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도 영화의 플롯에서 충분히 근거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다각적 사고방식을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다. [1]

자연을 대표하는 산과 산의 엄마. 이들의 모호함이 극 중 긴장감을 유지한다.

자연과 인간 문명

캐릭터 설정은 모호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미야자키의 의견만은 확고하다. 최소한의 인공물만을 남기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상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굉장히 래디컬하고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이상을 갖고 살아가야만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 나오는 자연은 무섭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자연은 가공되지 않은 비행석이 은은하게 빛나는 등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과 말로 소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지의 공포를 산다. 파즈와 시타가 ‘바루스’라는 파괴의 주문을 욀 때 라퓨타 성의 윗부분인 자연은 가차 없이 하층부의 인공물을 파괴하고 지구 대기 밖으로 떠난다. 가공된 비행석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는 속성도 자연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압적인 자연의 모습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정점을 찍는다. 처음 등장하자마자 인류에 저주를 퍼붓는 재앙 신부터 마지막에 노여움에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시시가미 앞에 인간은 나약하다. 관객은 자연의 전지전능함이 낯설다. 다수의 매체(주로 서양 매체)에서 자연은 항상 인간보다 아래의 것, 귀여운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같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디즈니가 만든 공주 시리즈를 보면 공주에게는 자연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항상 귀여운 동물 친구가 있다. 이런 영화를 보고 자란 우리는 자연이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일 때, 심지어 인간과 대등한 존재일 때도 두려움을 느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라퓨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뚜렷하다. 과도한 과학의 발전은 파멸을 초래하므로 최소한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파즈와 시타가 라퓨타 성을 파괴했을 때 파괴되는 것은 성 전체가 아니라 최소한의 인공물과 자연을 제외한 것들만이 파괴된다. 그들이 성을 탈출할 때도 엔진 없이 바람만으로 조종해야 하는 작은 비행기이다. 라퓨타 왕족이 만든 로봇마저도 라퓨타 성에 남아 이끼에 뒤덮인 채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있다.


애정 어린 작화

어릴 적에 그림을 한 번이라도 그려본 사람은 알 수 있을 텐데, 자신이 그리고 있는 인물이 웃음을 짓고 있으면 내 입 꼬리도 올라가고, 인물이 슬프면 나도 슬퍼진다. 물론 그냥 그릴 수도 있다. 실제 있는 사람도 아니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이상적인 몸매와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실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가가 사람을 사랑할 때 그가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 모든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등장인물은 다양한 외형을 갖고 있다. 물론 <라퓨타>에서 시타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마녀 배달부 키키>의 주인공 키키와 거의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열 살, 열한 살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시타가 있으면 아줌마인 도라도 있고, 키키가 있으면 좀 더 성숙한 청소년 우르슬라도 있다. 일본 아니메(재패니메이션)의 스타일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캐릭터의 다양화가 이뤄진다. 이 역시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여자 캐릭터가 친구가 없어서 한 명만 나와 비교대상이 없다든지, 여자 캐릭터가 두 명 이상이어도 체형과 얼굴이 분간이 안 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셀 애니메이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묘사를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는 요즘에 나오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나 픽사나 드림웍스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3D 애니메이션이 절대 우위이다. <파이퍼>(2016)의 바다 거품 묘사는 진짜 물 같고 <언어의 정원>(2013)의 비 내리는 장면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지만 이런 그림들은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지 못한다. 가슴을 움직이는 것은 매사 진짜 같지는 않더라도 진심으로 사람을 관찰한 작가가 그린 그림이다. 잠에서 깬 파즈가 일어나 시타를 보며 목과 가슴 언저리를 긁는 모습, 파즈가 트럼펫을 불기 전에 입을 축이는 모습,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신발을 신고 출발하기 전에 잘 신었나 신발 코를 톡톡 치는 모습, 쓴 경단을 먹은 치히로의 날갯죽지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을 꼬는 모습. 이런 모습을 그린다고 해서 애니메이션이 진짜 같아 보이지는 않아도 그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2] 애니메이션은 제작진의 의도가 가장 투명하게 보이는 영화 제작 방식이다. 그림과 카메라 워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강조할지, 어떤 것을 보여줄지 모두 제작진의 선택이다. 등장인물 모두가 모델 같은(비쇼넨, 미소년) 재패니메이션이나 여자 캐릭터의 다리나 가슴께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의 제작진들이 인류에 갖는 사랑이 클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우경화, 브렉시트 그리고 트럼프 당선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특정 집단을 악당으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일본, 영국, 그리고 미국의 수장은 국가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려면,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이 길이 유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30년 전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 그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끝까지 상대방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파멸을 피하는 길이라고 주장해왔다. 예술작품이 전쟁을 막거나 사회의 가장자리로 몰린 소수자들을 구원해주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내 영화를 볼 때 바로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했던 것처럼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집중해서 공감하는 법을 익히고 예술작품이 제시하는 사고방식을 연습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서 현실세계를 받아들이는데 영향을 미친다. 여느 때보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1] 확실히 <바람이 분다>(2013)는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전쟁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미화했다는 평이 대다수이다.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인 <꿈과 광기의 왕국>(2013)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솔직하게 이런 점을 인정하는 듯하다.

[2] 디즈니 스튜디오의 명작 <미녀와 야수>(1991)에서도 이런 작화가 돋보인다. 플롯은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연인 사이의 움직임을 잘 포착해 성공적으로 설득력 있는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 대표적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2017.2.10 puppysizedeleph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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