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래 글은 2019년 10월에 발행된 빅이슈 212호 커버스토리로 첫 공개되었습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빅이슈에 발행된 글에 오타가 있어 수정된 버전으로 발행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곱슬머리다. 긴 머리가 항상 눈을 가려 시선은 늘 아래에서 위로 치켜뜨는 듯하다. 이마와 코는 거의 직선으로 떨어지고, 긴장한 듯 어금니에 힘을 주면 턱선 전체가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모델 같이 마른 몸에 날카로운 인상을 갖긴 했지만 뉴요커 특유의 빠른 말투와 말끝을 흐리는 버릇 때문에 금새 또래 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뇌하는 햄릿에 떠오르기도 하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남주인공을 연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잘생겼다’보다는 ‘아름답다’가 더 잘 어울리는 티모시 샬라메의 매력은 그가 배우로서 스크린에서 움직일 때 배가 된다.
<레이디버드>
티모시 샬라메를 처음 본 것은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버드>에서다. <레이디버드>에서 티모시 샬라메는 주인공이 두 번째로 사랑에 빠지는 남자아이를 연기한다. 그는 첫 등장에서 아주 암울하고 허세 넘치게 베이스를 연주한다. 유치뽕짝하고 클리셰 덩어리지만 이 장면이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그 이유는 그가 유별나게 잘생겨서 첫눈에 반해서가 아니다. ‘쟤한테는 절대 마음을 뺏기면 안 된다’고 강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다짐은 몇 분 뒤 티모시 샬라메의 두 번째 등장에서 바로 무너진다. 그의 두 번째 등장은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서 책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다. 주인공이 다가가자 그대로 올려다보는데, 흐트러진 곱슬머리가 눈을 가리는 모습에 무장해제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극강의 허세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 없긴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구글에 이 배우의 이름으로 이미지 서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검색을 하면 할수록 사랑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그가 실제로는 이 허세 캐릭터와 정반대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티모시 샬라메가 인터뷰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우디 앨런이나 웨스 앤더슨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말이 빠르고 주체할 수 없이 어색한 사람이다(실제로 우디 앨런의 <어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에 등장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사실 티모시 샬라메가 배우로서 감정선을 전달하는 능력은 루카 구아다니노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이미 다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다 볼 시간조차 없다면 마지막 5분만 봐도 된다고 생각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티모시 샬라메는 한여름에 첫사랑을 앓는 소년 엘리오를 연기한다. 그가 사랑한 남자는 미국으로 돌아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엘리오는 이 소식을 듣고 일렁이는 불 앞에서 그와 함께한 여름을 가만히 반추한다. 뒤에서 어머니가 ‘엘리오’하고 부르는 순간, 마치 지금껏 해준 이야기의 끝은 여기라고 말하는 것처럼 엘리오는 관객과 시선을 맞추고 떠난다. 카메라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견디고, 눈빛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이 장면은 감독의 연출이 아닌 티모시 샬라메라는 배우 고유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다. 그 외 망설이는 몸짓, 허세로 가득한 춤사위, 그러면서도 연인을 좇는 불안한 시선 모두 그가 얼마나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에 능한 배우인지 증명한다.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를 공부하기 위해 예술 고등학교에 다녔고 뉴욕에서 연극도 올리고 <레이디버드>같은 영화도 찍긴 했지만, 당시 스크린 경험이 얼마나 적었는지 생각하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로 티모시 샬라메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후보에 오른 최연소 배우가 되었다. 아쉽게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전 세계 수많은 관객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에는 충분했다.
<뷰티풀 보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2017년 2월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이미 전국 비평계의 이목을 사로잡기 시작했을 때, 티모시 샬라메는 <뷰티풀 보이>에 공식 캐스팅되었다. 이 영화에서 티모시 샬라메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마약 중독으로 고통 받던 작가 닉 셰프를 연기한다. 제목 '뷰티풀 보이'는 아버지 데이비드 셰프가 어린 시절 닉에게 불러준 존 레논의 노래이자, 데이비드 셰프의 부모로서 자녀의 약물 중독 경험을 담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마약 중독자가 어울린다는 표현을 쓰기는 싫지만, 흐트러진 머리와 가는 팔다리, 어딘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처진 눈매가 자아내는 불안한 아우라 덕분에 티모시 샬라메는 이 배역에 틀림없이 적격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미지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그의 밝은 모습이 돋보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사랑에 빠진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엘리오가 피아노에 일가견이 있고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비범한 소년이었다면, 닉 셰프는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청년이다. 이 영화는 그 평범한 일상을 어떻게 잃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되찾기 위한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평범한 닉의 모습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버지와 함께 서핑 갔을 때 들려오던 파도 부서지는 소리, 여동생과 그네를 탈 때 비추는 햇살, 그리고 남동생과 해변에 누워 손에 쥐었던 모래알은 추상적인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 오 분여간 티모시 샬라메가 낭독하는 찰스 부카우스키의 시 'Let it Enfold You'도 그런 내용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뻔한 것만큼 인생에서 지켜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을.
<추후 행보>
티모시 샬라메의 차기작 중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작품은 <더 킹>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헨리 5세’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11월 1일 넷플릭스로 공개될 예정이다. 실제로 티모시 샬라메와 연인 관계인 릴리 로즈 뎁이 이 영화에서 캐서린 왕비 역을 맡아 정식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가 넷플릭스로 풀리기 전 국내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10월 8일 오후 8시와 익일 오전 10시에 티모시 샬라메 GV가 있다고 하니 실물을 영접하고 싶다면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한편 <레이디버드>의 감독 그레타 거윅과 배우 시얼샤 로넌이 함께한 <작은 아씨들>도 북미에서 크리스마스에 개봉 예정이다. 티모시 샬라메는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 '조'와 사랑에 빠지는 '로리' 역을 맡았다. 내년 하반기에 공개될 예정인 드니 빌뇌브의 <듄>은 프랭크 허버트가 1965년 쓴 SF 소설이 원작으로, 지금까지 티모시 샬라메가 참여한 영화 중 가장 스케일이 클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웨스 앤더슨의 <더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는 '제프리엘리'라는 배역을 연기한다고 하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 위치한 미국 신문사의 기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코 짧지 않은 배우 덕질 경력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잘 되길 바랐던 배우가 작품 복이 없거나 경력이 단절될 때였다. 티모시 샬라메의 경우 그런 이유로 슬플 일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뷰티풀 보이> 이후에 <더 킹>같은 작품을 한 행보를 보면 <배스킷볼 다이어리>이후 <아이언 마스크>에 출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티모시 샬라메의 연극 배경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같은 밀도 있는 작품, 그리고 그레타 거윅과 시얼샤 로넌과의 지속적인 협업이 그를 독자적 위치에 있는 배우로 만들어 준다. 그가 시상식이나 영화제에서 하고 나오는 도전적인 스타일 또한 이전의 남자 배우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덧붙여 그는 우디 앨런의 <어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서 얻은 수익 전부를 헐리우드 미투 운동 재단에 전부 기부함으로써 젊은 남성 할리우드 스타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 영화계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2010년대 후반에 등장해 상당한 호응을 얻으며 성장하고 있는 티모시 샬라메는 훌륭한 배우이자 변화하는 영화계의 지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