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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Sep 08. 2021

독립하기

BBC 드라마<플리백>시즌 2

* 아래 글은 문학 플랫폼 던전에 2021년 8월 23일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https://www.d5nz5n.com/work/82


0.

  지금까지 온갖 ‘인디영화에 관해서 써보았다. 근데  인디펜던트, 독립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불과 1-2세기   세계를 휩쓴 제국주의 덕분에 현재 웬만한 나라에서는 각자의 독립을 기념하는 날이 있다.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 되었든,  날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폭죽을 터뜨린다든지 일종의 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독립에는 슬픔 또한 수반되지 않는가? 대부분의 경우  국가가 독립을 향해가는 과정에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따른다. 개인의 독립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성년을 맞이하거나, 분가를 하여 집들이를   파티를 하곤 하지만 우리 모두 익히 알다시피 독립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외로움을 마주하는  또한 뜻한다.  개인으로서 독립하는 과정은 서서히 이뤄질 수도 있지만 일종의 분절을 수반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전의 상태와 다른, 아니 이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1.

  피비 월러 브릿지의 <플리백 Fleabag>(2016-2019) 시리즈는 완전히 극단적인 의미에서의 독립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플리백’은 기존의 가족으로부터, 우정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독립한다. 엄마의 죽음 뒤 아빠는 엄마의 제자였던 대모와 재혼을 계획하고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는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늘 오락가락하는 사이였던 남자친구 해리는 끝내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아이를 가진다. 플리백은 기존의 관계들과 하나씩 이별함으로써 독립하는 중이다. 이 과정은 등골 시리도록 고통스럽고, 사무치게 외롭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외로운 이야기가 늘 슬플 이유는 없다. 독립이라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외로운 과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끼리 그것을 공유하고 자조할 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인사이드 조크를 나누는 거대한 집단 아닌가?

  플리백과 카메라 렌즈, 우리는 곧 인사이드 조크를 공유하는 사이이다. 이는 명백한 방백의 패러디로, 관객과 발화하는 인물을 제외한 극 중 다른 인물들은 이를 듣지 못한다. 질 나쁜 남편을 변호하는 언니와 말싸움을 하든, 처음 만난 남자와 항문 섹스를 하든, 무슨 일을 겪건 플리백은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카메라 렌즈를 직시하며 우리에게 빠르게 농담 두어 개를 던지곤 한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 인생. 플리백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 있는 자신으로부터 늘 한 발짝 물러날 줄 안다. 아니, 한 발짝 물러나야만 이 고통스러운 독립의 과정을 견딜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우리를 향하여 농담을 던질지 모르는 플리백을 보면서 우리는 그녀와 일종의 눈치게임을 하게 된다. 이 드라마의 묘미는 이 게임에서 기인하는 긴장감에 있다.


2.

  당연하게도 <플리백>은 이 게임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끝난다. <플리백> 시즌 1은 그녀의 친구의 죽음을 감내하는 데 집중하고, 시즌 2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도전하고 실패한다. 왜 플리백과 관객의 인사이드 조크, 눈치게임은 시즌 1이 아닌 시즌 2에서야 끝날 수 있었을까? 뭐, 재미없는 답변부터 해치우자. 확실한 이유는 플리백 본인이 자신의 절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언니로부터도 내쳐지면서 끝나는 시즌 1에서 끝나버린다면 플리백의 인생이 너무 슬퍼서일 테다. 더 확실한 이유는 아마존 스튜디오에서 시즌 2에 투자하면서 좀 더 행복한 이야기, 즉 더 상업적인 이야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시즌 1보다는 덜 우울한 시즌 2는 첫 에피소드의 오프닝에서부터 ‘이것은 사랑 이야기’라고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플리백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는 아빠와 새엄마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게 된 젊은 가톨릭 신부다(신부가 처음 등장하고, 이 드라마의 인물들을 재소개하는 시즌 2의 1화가 최고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표면상으로는 온갖 변태 성욕에 중독되어있는 플리백에게 걸맞은 설정으로 보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처음부터 기분 좋은 긴장감이 흐른다. 문제는 이 긴장감이 플리백의 기대와 달리 성적 긴장감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부와 대화하던 중, 플리백이 평소처럼 관객을 향해 방백을 하자, 신부는 지금 뭐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나중에는 신부 또한 카메라 렌즈를 찾아내 바라보기까지 이른다. 플리백과 신부 사이에 생겨난 어떤 끈으로 인하여 플리백은 신부에게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 앞에서는 도망갈 곳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은 플리백에게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플리백은 신부에게 자신의 과거, 고민, 슬픔, 절망 등을 고해할 수밖에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신부 또한 플리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신이 일궈온 경력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3.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한다. 신부의 말마따나,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일은 이렇기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인정과 실천은 별개로, 신부와 플리백은 두 사람의 사랑은 계속해서 실천할 수 없는 것으로 결정하고 각자의 길을 간다. 이 순간 플리백은 자신을 뒤따르는 카메라를 보고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신호한다. 나는 이것이 먼저 플리백의 삶이 이전보다 견딜만한 것이 되었으며, 그리고 그녀 스스로 고통스러운 삶을 견딜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플리백을 믿지 않고 남편과의 삶에 안주하기로 결정했던 언니가, 플리백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복귀한 후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선 것이 일단 플리백의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줬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 이후 공중분해된 가족 내에서 두 자매는 끝내 연대하게 된다. 플리백이 만나는 ‘올해의 비즈니스 우먼’ 벨린다의 말마따나, “사람이 전부다. People are all we’ve got.” 사람이 중요한 만큼, 사람과 연대하는 일은 힘들다. ‘연대’라는 단어가 중요한 시기인 만큼 자주 쓰이곤 하는데, 연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 듯하다. 플리백과 언니가 연대하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다룬 방식이 나는 이 드라마의 특히나 감동적인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뻔한 이유겠지만 플리백이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삶은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 말 그대로 벼룩 자루 fleabag, 인간쓰레기 같은 그녀를 사랑하는 이가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라는 사실은 그녀가 얼마나 사랑하기 힘든 사람임을 입증한다. 한편 플리백은 쓰레기일지언정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플리백은 자신보다 훨씬 성공하고 잘난 언니보다 더 용감할지 모른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이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사랑을 불가피하게 포기한다면 얼마나 슬플지도 알면서도 놓아줄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플리백의 능력을 그녀의 아버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는 플리백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네가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법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그래서 너에게 그리도 고통스러운 것이야. I think you know how to love better than any of us. That’s why you find it all so painful.”


4.

  플리백은 독립의 이야기이다. 이전의 가족, 우정, 사랑으로부터 독립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뒤따르는 카메라, 제3의 시선과 작별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자신이 마주한 슬픔에 대한 농담하기를 끝내는 것이다. 플리백은 이렇게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인생에 진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이전의 그녀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닥친 비극으로부터 멀어지려고만 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이었던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한꺼번에 닥쳐오는 슬픔과 끊어지는 듯한 독립의 고통을 견뎌내는 그녀의 방식이 농담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네트 Nanette>(2018)의 하나 개즈비가 증언했던 것처럼, 셋업과 펀치라인으로만 이루어진 농담은 한 사람의 이야기 전체를 담는 발화가 절대 될 수 없다. “웃음은 약이 아닙니다. 치유법은 이야기에 있어요. 웃음은 그저 약을 덜 쓰게 하는 설탕일 뿐이에요. Laughter is not our medicine. Stories hold our cure. Laughter is just the honey that sweetens the bitter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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