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다쓰루 著, 『무지의 즐거움』 점선면 서평
공부는 앎을 채워나가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식을 그러모으는 일에 공을 들였다. 누군가 써놓은 멋진 말을 공책에 적어 소유함으로써 지적 결핍을 채우려 했다. 처음에는 퍽 만족스러웠다. 가진 게 없었으니 ‘너 자신이 되라!’ 따위의 자기계발서 문법에 매료될 수밖에. 트렌드 기술자가 매년 내놓는 유행에 따라 ‘텍스트힙’의 패션을 걸치고, SNS 프로필에 오래전에 죽은 문장을 진열하면서, 나의 지적 불모를 필사적으로 숨겼더랬지.
쓸모없는 노력이었다. 채울수록 오히려 허전해졌고, 남의 말을 빌려 쓸수록 내 목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았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처럼 배고프니 먹고, 모자라니 사고. 불가능한 100%는 마르지 않는 허기를 생산했고, 늘 깡말랐던 나는 쳇바퀴에 스스로를 가둔 채 발을 굴렀다. 골방에 틀어박혀 헛짓거리를 해온 셈이다.
빈 수레만 요란한 채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던 시기. 진정한 성장을 위해서는 나의 무지를 까발려야 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즈음 이 책을 만났다.
우치다 다쓰루 著. 『무지의 즐거움』. 유유출판사.
일본의 사상가이자 무도가인 ‘우치다 다쓰루’가 배움, 글쓰기, 지성, 성숙에 관하여 쓴 에세이다. 프랑스 현대사상을 전공했지만, 그의 글은 학술 논문이라기보다는 산문에 가깝다. 문답식으로 구성된 각 꼭지는 독립적이되 하나의 축을 공유한다. ‘모른다는 것이 왜 즐거운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보통 무지는 부끄러움의 대상이지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니까.
이 책은 겉보기에 배움의 태도를 권하는 가벼운 에세이다.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논의가 전개된다. 앎과 무지, 소유와 순환, 보편의 언어와 개인의 언어라는 대극이 교차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지성’의 형상. 우치다는 멀쩡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배움의 표면에서 미세한 균열을 읽어낸다.
나는 이 책을 두 개의 질문으로 읽었다. 하나는 ‘왜 무지를 숨기는 것에서 드러내는 것으로 태도가 바뀌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무지한 자는 어떻게 자기 언어를 획득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우치다는 이렇게 썼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 적어도 ‘나는 이것도 알고 있고 저것도 알고 있다’라고 아는 것을 열거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단순한 겸양일까. 계속 읽다 보면 알게 된다. 그는 더 나아가고 있음을.
“배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배움이 정말로 일어나면 ‘나’라는 주어는 더 이상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무지의 의미가 달라진다. 무지는 단순히 ‘아직 모르는 상태’가 아니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가 고정된 완성품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앎을 채워서 현재의 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을 인정함으로써 현재의 나를 해체할 준비를 하는 것. 우치다가 보기에 배움은 결핍의 충족이 아니라 자아의 쇄신이다.
배움이 결핍을 전제하지 않음을 알았을 때, 나는 안도했다. 어느샌가 사라진 쳇바퀴. 기준의 부재는 무한한 자유를 선물했다. 그러나 자유는 불안과 함께 오는 법. 우치다는 그 불안을 외면하지 말라고 한다.
“지성을 개발하려면 뭔가를 ‘알았다’고 생각하고 안주하기보다 뭔가를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사고하는 부담을 견디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앎의 획득을 유보함으로써 지적 능력이 향상된다는 주장은 매력적이다. 방치된 유제품에 균이 번식하여 요거트로 발효되는 것처럼. 서둘러 답을 가져와 불안을 해소하면, 그 순간 사고는 멈춘다. 장기투자자처럼 앎을 수익화하지 않은 채 깨달음을 유예하는 것. 모름의 영역이 확장되어야 그 자장에 휩싸인 앎이 자연스레 배어들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이 제안하는 첫 번째 태도다.
그런데 무지를 인정한 뒤의 풍경은 다르다. 무지를 인정한 뒤, 그 자리에서 무엇이 태어나는가.
우치다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쓰는 힘을 갖췄다는 것은 자신의 보이스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보이스로 지어낸 말에는 고유한 율동과 흐름과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읽었을 때 무엇이 쓰여 있는지 퍼뜩 가늠이 잘 안 되어도 계속 읽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개성은 설명에서 발현한다.” 어려운 이론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라, 복잡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풀어낼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지성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생긴다. 보통은 많이 알아야 자기 목소리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전문지식을 쌓고, 권위를 획득하고, 그 위에서 발언할 때 비로소 힘이 실린다고. 우치다 자신도 전문가와 멘토의 언어를 구별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일을 돈벌이로 삼는 사람은 상대가 누구라도 질문이 같으면 같은 대답을 합니다. 하지만 멘토는 다릅니다. 같은 질문이라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집니다.”
전문가의 언어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보편적이고 균질하다. 반면 멘토의 언어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상황에 따라 변한다. 고정된 앎이 아니라 유동하는 앎이다. 이것은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빌려온 지식으로 무장한 글은 깔끔하지만, 누구의 것도 아니다. 검색 엔진에 최적화된 글, 생성형 AI가 딸깍 한 번에 만들어내는 글. 그런 글에는 보이스가 없다. 마치 예전의 나처럼.
나는 공학을 전공했고 오랜 기간 군인으로 살았다. 교양 분야에서는 문외한이다. 머리에 든 건 없는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빈 수레는 요란했으나 학술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미숙했다. 세상 사람들이 들어줄 리 만무하다. 당장 나만 해도 책을 읽을 때 ‘이 사람이 쓸 만한 내용인가?’를 따지고 있으니.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에세이라는 형식이 왜 나를 끌어당겼는지. 에세이는 전문가의 형식이 아니다. 학문과 학문을 넘나들고,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형식이다. 완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시행착오 자체가 글이 된다. 무지한 자에게 허락된 무한한 시행착오의 글쓰기. 이곳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니까.
두 질문을 겹쳐보면 이 책의 진짜 주제가 드러난다.
첫 번째 질문의 답. 무지를 숨기면 사고가 멈추고, 드러내면 사고가 시작된다.
두 번째 질문의 답. 자기 목소리는 완벽한 앎 위에서가 아니라, 모름을 인정한 자리에서 태어난다.
이 둘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보인다. 무지를 숨기려 할 때 우리는 남의 언어를 빌려 쓴다. 텍스트힙의 패션을 걸치고, 띠지의 추천사를 따라가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성공 공식을 복사해 붙여 넣는다. 성대에 살이 쪄서 목소리에 힘을 줘 봤자 기름진 간신배 음성만 들릴 뿐이다. 그 언어는 매끄러우나 나의 것이 아니다.
반대로, 무지를 드러낼 때 비로소 자기 언어가 태어난다. 더듬거리고, 쉬운 것을 어렵게 쓰고, 퇴고할 때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끝내 자기 방식으로 말하려는 그 과정 자체가 목소리가 된다.
우치다가 “우리를 버리고 나라는 1인칭 단수형으로 말합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자신의 무지를 학문적 결격사유가 아니라 발화의 조건으로 삼고 있었다. 보편의 언어를 포기하고 개인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지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무지를 인정한 자만이 ‘우리’라는 안전한 복수형을 버리고 ‘나’라는 위험한 단수형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말하는 ‘무지의 즐거움’은 앎의 부재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다. 자기 언어의 탄생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자리에서, 남의 말이 아닌 자기 말이 처음으로 입 밖에 나오는 순간. 닮은 모습, 다른 영혼으로. 환경이 변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유전자는 돈오(頓悟)하고, 재배열된 DNA는 화들짝 놀라 단박에 형질을 바꾼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겉으로 다를 것이 없다. 여전히 공학도 출신이고, 여전히 교양 분야에서 허우적거리고, 여전히 빈 수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빈 수레가 요란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꼴사납더라도 AI보다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서둘러 덕지덕지 붙은 지적 군살을 태우고 숙고가 부재한 형용사를 지우려 한다. 소음이 가득한 세상에 내보내는 탁한 목소리라도 괜찮다. 그런 오류는 복제 불가능하니까. 서툴더라도 내 말로 하면 된다.
이 서평도 그 시행착오의 일부다. 빈 수레의 첫 문장이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