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점선면 서평
어렸을 적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책을 많이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어린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우주가 속삭였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책은 옳다’란 명제가 내 머릿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때가.
게걸스럽게 책을 읽었지만, 훌륭해지는 느낌은 없었다. 대신 조급함이 생겼다. 주변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 홀로 멈춰있다는 감각이 나를 괴롭혔다. 당연히 책 내용은 깊이 침투하지 못했다. 독자가 벽을 쌓고 있었으니까. 해치운 권수가 전리품처럼 쌓여가는 것을 보며, 나는 ‘지식의 소유’를 만끽하고 있었으니까.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이 마약처럼 작용했다. 자연스레 반복되는 악순환. 책은 계속 집어삼키는데 소화 못 시키니 매번 배탈이 났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나의 독서는 헛것이었음을. 독서는 ‘읽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읽기’에서 시작해서 삶을 성찰하고, 지금을 숙고하여 ‘글쓰기’까지 나아가야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내 생각과 닮은 책을 만났다.
P.G.해머튼 著. 『지적 생활의 즐거움』(2015). 리수.
출간된 지 무려 100년이 넘은 책이지만 고리타분하지 않다. 오히려 엊그제 쓰인 책처럼 시의성을 갖는다는 게 놀랍기까지 하다. 저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를 위해 동시대 지성인의 생활 습관과 저명한 문인들의 사생활과 태도를 생생하게 들여다봄으로써, 독자에게 진정한 지적 생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겉보기엔 지적 생활을 권장하는 가벼운 에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묵직한 사유를 품고 있다. 읽고, 생각하며, 글을 쓰고 말하는 생활. 곰곰이 따져 보면 이것은 일상의 전부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저자는 생활 속에서의 내면 소통과 관계에 관한 모든 태도를 논하는 셈이다. 한쪽으로 기울 법한 주제이지만, 이 책은 놀라운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서 두 개의 질문을 끌어냈다. ‘지적 생활’이라는 네 글자가 실은 서로 다른 두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지적’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방향, 즉 정신의 훈련에 관한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생활’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방향, 즉 일상의 형식에 관한 질문이다.
이 책은 프롤로그부터 분명하다. 지적 생활은 유리한 조건을 발판 삼아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 숱한 제약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극복해나가는 행위라고. 저자는 소망과 실천을 구별한다.
“소망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습니다. 소망 그 자체만으로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인가가 되려면 훈련에 몸을 맡겨야 됩니다.”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 이 모든 소망은 시작에 불과하다. 소망에서 멈추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훈련이란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머튼이 말하는 지적 생활은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매일 자신을 단련하는 능동적 행위다. 좋은 기억력이란 많은 것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관련 있는 것들 사이에서 연상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지식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힘. 이것은 벼락치기로 생겨날 수가 없다. 세심한 관찰이 꾸준하게 누적되어야 관계없던 것들 사이의 은유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뼈아프다. 나의 독서는 훈련이 아니라 수집이었으니까. 읽은 권수가 곧 실력이라는 착각. 해머튼의 말대로 지적 훈련이 부족한 사람은 책을 읽어도 양질의 자극을 건져올리지 못한다. 바로 과거의 내 모습이다. 훈련 없는 독서는 먹기만 하고 소화하지 못하는 식사와 같다.
훈련이라는 말만 남으면 지적 생활은 고행이 된다. 이것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다행히 해머튼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책을 펼쳐놓는다고 해서, 펜과 씨름한다고 해서 지적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적 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 전반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고하고, 창작하고, 영감을 얻는 매 순간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만이 지적 생활이 아니라, 걷고 먹고 대화하는 모든 순간이 지적 생활의 재료가 된다는 뜻이다.
저자는 요리에 빗대어 말한다. 좋은 요리사에게 중요한 것은 재료끼리 주고받는 맛의 뒤섞임과 화력의 사용법이라고. 인간의 지식이 넓어지는 과정과 재료들이 하나의 음식이 되는 과정이 닮았다고. 지적 생활이 ‘생활’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양한 재료가 있어야 요리가 가능하듯, 삶의 여러 경험이 뒤섞여야 사유가 깊어진다. 서재에만 갇혀 있으면 재료가 부족해진다. 금속활자로 찍어낸 종이 위 잉크가 사람의 배를 채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사소한 일에도 흥미를 보이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저자는 썼다. 이것은 지적 생활이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행위로 수행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산책 중에 떠오르는 생각, 대화 속에서 얻는 관점, 실패에서 건지는 통찰. 이 모든 것이 생활 속에 녹아들 때 비로소 지적 생활이 된다.
훈련과 생활. 이 두 단어를 겹쳐 놓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훈련만 있으면 지적 생활은 의무가 된다. 매일 정해진 분량을 채우는 노동. 생활만 있으면 지적 생활은 취미가 된다. 기분 좋을 때 책 한 권 펼치는 여유. 하지만 두 가지 모두 해머튼이 그리는 지적 생활은 아니다. 의지로 시작하되 습관으로 스며드는 것. 노력하되 자연스러워지는 것. 이것이 ‘지적 생활’이라는 네 글자가 하나의 단어로 붙어 있는 이유다.
저자는 변화를 원한다면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강도를 높여가라고 말한다. 갑작스러운 선언은 흥분을 불러오지만, 그것은 기대감이 아니라 두려움과 낯설음이 복잡하게 얽힌 무리한 심장박동이라고. 이 문장에서 나는 과거의 내 조급함을 만났다. 훌륭해지겠다는 선언, 올해는 백 권을 읽겠다는 다짐. 그것은 훈련이 아니라 흥분이었고, 생활이 아니라 이벤트였다.
“지적 생활은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을 재는 것입니다.”
결국 지적 생활의 도착지는 자기 자신이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훈련이 나를 단련하고, 생활이 나를 확장할 때, 둘이 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기 이해’다. 이를테면 독서를 통해 삶을 반추하고, 그것을 글로 써서 나를 조금씩 바꿔나가는 일이 도미노처럼 하루하루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 그리하여 나날이 갱신되는 인간성의 구현.
백 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의 어려움과 가치는 변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든,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자기 자신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훌륭한 사람’은 여전히 아득하고. 어른이 된 나는 그것에 의지한 채 밤을 건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