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두께

가와우치 아리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서평

by 고유동

프롤로그


눈은 대체로 신뢰할 만한 감각기관이지만, 한계 또한 뚜렷하다. 빛이 있어야 하고 초점이 맞아야 한다. 그저 눈이 있다고 해서 ‘본다’는 행위가 성립할 순 없다. 대상이 있고, 의지가 대상을 지향해야 하며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시각중추에 닿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의 복잡성은 정교한 안구의 구조와 병합되어 ‘본다’라는 극히 일상적인 행위를 심오한 층위로 격상시킨다. 보이지 않는 것조차 볼 수 있을 정도로.


살면서 똑바로 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특히 회의 중에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다며 한심하게 평가받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눈으로 보이는 대로 보는 건데 대체 뭘 더 들여다보라는 거지?’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모두가 틀린 것처럼 느껴졌다. 저들은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물리적 수준 이상의 ‘본다’는 행위가 궁금해질 때쯤, 이 책을 읽었다.


책 소개


가와우치 아리오 著.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2023). 다다서재.


제목부터 호기심을 부르는 책.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전맹(全盲) 시각장애인이, 보기 위해 존재하는 미술관에 가서 볼 수 있는 사람과 작품을 감상한다. 여러 미술관을 돌며, 저자가 보이는 것을 묘사하면 앞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가 질문하면서 그림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서로의 추억을 소환한다.


겉보기엔 마음이 맞는 두 친구의 미술관 탐방기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사람과 앞이 보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씨줄과 날줄이 엮이듯, 부드럽게 직조되는 이 모순적 상황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 ‘본다’는 개념이 ‘눈’이라는 기관에 한정되어 있지 않아서다. 눈은 그저 매개체일 뿐. ‘본다’는 뇌 신경계에 접수된 감각으로 기능하므로, 감각이란 상위 개념에 ‘본다’는 행위가 포섭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두 개의 질문으로 읽었다. 하나는 눈이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보는가에 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눈이 있는 사람은 왜 제대로 보지 못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점: 눈이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보는가


시라토리 씨는 전맹인데 미술관에 간다. 보기 위해 존재하는 장소에, 볼 수 없는 사람이 간다. 상식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문장. 그러나 이 책은 그 불가능한 문장이 성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방법은 단순하다. 저자가 눈앞의 작품을 말로 묘사하고, 시라토리 씨가 질문한다. 이 단순한 과정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시라토리 씨가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는 작품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나 공식적인 해설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눈앞에 있는 것’이라는 한정된 정보에 기초해 이뤄지는 즉흥적인 대화에야말로 흥미가 있어 보였다. 작품 배경에 정통한 사람이 들려주는 해설은 오히려 ‘일직선으로 정답까지 나아가서 따분해.’라고 했다.”


정답은 여백을 지우고 해설은 관점을 하나로 수렴시킨다. 그러나 대화는 여백을 만든다. 시라토리 씨는 눈이 아니라 대화로 보고 있다. 정확하게는 타인의 시선이 말로 번역된 것을 빌려오되 그것을 자기 안에서 시각 정보로 재구성한다. 저자가 모호한 빨간색과 그것에 대한 혼란스러운 인상, 추억 등을 말하면, 시라토리 씨는 그 언어 안에 자신의 기억과 경험과 감각을 겹쳐놓는다. 질문으로 배경 이미지를 보강한다. 시각장애인의 ‘본다’란 행위는 눈이 아닌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선: 눈이 있는 사람은 왜 제대로 보지 못하는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더 흥미로운 것이 드러난다. 시라토리 씨와 함께 미술관에 갈수록, 눈이 보이는 저자 쪽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저자가 혼자 미술관에 갔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혼자 볼 때는 눈이 있으니까 그냥 본다. 캡션을 읽고, 작품을 훑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빨간색이 있으면 ‘빨간색이구나’하고 지나간다. 그러나 시라토리 씨 옆에 서면 다르다. “빨간색이 있어”라고 말해야 한다. 그 순간, 저자는 자신이 방금 본 것을 점검하게 된다. 말하기 위해 다시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빨간색과 관계된 추억이 떠오르고, 그 공간 자체와 관련된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작품을 보는 방식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일치하지는 않아요. 그런 인식의 엇갈림을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 대화하면서 보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인식의 엇갈림이 핵심이다. 같은 작품 앞에 서도 보는 것이 다르다. 눈이 보이는 사람끼리도 다르고,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도 다르다. 세계 인구만큼의 독립적인 ‘눈’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름’이 결함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나의 인식과 타인의 인식이 어긋나는 그 지점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눈이 있는 사람은 왜 제대로 보지 못할까. 역설적이게도, 눈이 있어서다. 눈이 있으니까 이미 봤다고 생각한다. 효율적으로 진화한 뇌는 더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다. ‘빨간색이구나’에서 생각을 멈춘다. 그러나 눈이 없는 사람은 볼 수 없어서 계속 묻는다. 계속 묻기 때문에 계속 본다. 더 오래, 더 깊이, 더 다양하게 본다. 제대로 ‘본다’는 행위의 실체는 ‘반복’에 있다.



면: 콜라주라는 감각 오려 붙이기


두 질문을 겹쳐보면 이 책의 진짜 주제가 드러난다. 눈이 없는 사람은 대화로 본다. 눈이 있는 사람은 대화를 통해 비로소 제대로 본다. 양쪽 모두에서, ‘본다’는 행위의 핵심은 눈이 아니라 대화다. 나의 관점이 타인의 관점과 부딪히고, 어긋나고, 겹쳐지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다.


“추모비와 쇼핑몰과 '그날의 음성'이 물리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그 장소는 아까 본 오타케 신로의 콜라주 작품 같았다. 사실 도시 자체가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과 일, 경제, 여행과 일상, 온갖 기능과 제도, 감정과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다.”


‘본다’는 행위도 콜라주와 다르지 않다. 나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 지금의 감각과 과거의 기억 모두가 겹쳐진다. 어쩌면 순수하게 눈으로만 보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기억으로 보고, 감정으로 보고, 타인의 말로 보고 있으므로. 그 퇴적의 역사를 감지하기 위해 손을 뻗고, 대화를 나누어 겹침의 두께를 느끼는 것. 바로 이것이 깊이 본다는 것의 진의 아닐까.



에필로그


책을 덮고 나는 다시 생각한다. ‘똑바로 보라’는 말. 이제 조금 다르게 들린다. 그것은 눈을 크게 뜨라는 뜻이 아니었다. 혼자 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타인의 시선을 빌리고, 자기의 감각을 의심하고, 그 사이에서 생기는 어긋남을 통해 다시 보라는 뜻. 시라토리 씨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묻는다. 묻기에 본다. 나는 눈이 보이지만 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서 보지 못한다.


이제는 회의할 때 조용히 앉아만 있지 않는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거나 자주 질문한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면 속으로 자문자답한다. 옆에 시라토리 씨가 있다고 상상하면서. 아마 이것이 본다는 것이리라. 눈으로 겉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묻고 겹치면서 계속 다시 보는 것. 끝나지 않는 콜라주가 편견 위에 층층이 겹쳐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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