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부름

파스칼 키냐르 著, 『세상의 모든 아침』 점선면 서평

by 고유동

프롤로그


내가 느끼는 생의 감각은 대체로 아날로그적이지만, 가끔은 푸르게 깜빡이는 디지털처럼 분절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크게 감동했거나 깊은 슬픔에 빠졌을 때가 그렇다. 한꺼번에 많은 감각 정보가 오감을 통해 밀려든 터라 신경계에 무리가 간다. 말초신경에서 뇌에 이르는 전선은 피복이 벗겨져 자주 합선되고, 구리 선 몇 개가 잘린 통에 신호는 지연된다. 흐르는 경험을 칼로 벨 수 있는 상태랄까. 그렇게 잘린 순간의 단면은 생채기로 뒤덮여있다. 몰랐으면 지나갔을 투명한 통증이 느껴진다. 찰나에 발생한 일회적 사건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이르고, 포착된 ‘스크린샷’은 갤러리에 전시된 채 느리게 재생된다. 마치 초당 30프레임조차 충족하지 못해 뚝뚝 끊기는 20세기 흑백영화처럼.


지연된 영상이 착각을 만든다. 나는 순간을 온전히 저장해뒀고, 그것은 반복 재생이 가능하므로 소유물이 됐다고 확신한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충동이 들어 기록해 둔 삶의 단면을 살펴본다. 생채기는 보이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증상이 사라진 추억은 차갑게 증언한다. 지금 네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탈피를 끝낸 나비가 버려둔 껍질이라고. 그렇다면 살아 숨 쉬는 나비는 어디에 있는 걸까. 진짜 삶의 단면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쯤, 이 책을 만났다.


책 소개


파스칼 키냐르 著. 『세상의 모든 아침』(2013). 문학과지성사.


프랑스의 국민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이다. 이 작품은 사제 관계인 두 음악가의 상반된 인생을 교차하듯 그리면서 진정한 예술가의 길과 사랑, 삶과 죽음을 숙고한다. 언어를 넘어선 영혼과의 소통, 창작의 본질, 예술가가 지향해야 할 모범적인 태도에 관한 이야기가 스승인 ‘생트 콜롱브’와 제자인 ‘마렝 마레’의 입을 빌려 흘러나온다.


겉보기엔 스승과 제자가 음악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었다가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무위(無爲)를 추구하는 스승과 출세(出世)를 지향하는 제자가 현악기인 ‘비올라 다 감바’를 대하는 태도라든지. 연인을 향한 사랑과 음악을 향한 열정이 병존하지 못한 채 서로의 '목적'이거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슬픈 진실처럼.


나는 이 책을 두 개의 질문으로 읽었다. 하나는 스승이 왜 제자의 악기를 부쉈는지에 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스승이 왜 아내의 영혼 앞에서 연주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점: 스승은 왜 제자의 악기를 부쉈는가


생트 콜롱브에게 있어서 음악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제자가 왕실에서 연주했을 때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자 마렝 마레는 그런 스승을 이해할 수 없다. 청중 없는 음악이 대체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인가. 화를 이기지 못한 스승은 끝내 제자의 악기를 부순다.


“자네는 눈에 보이는 왕을 즐겁게 하고 있지. 남을 즐겁게 하는 일, 그건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네. 나는 목 놓아 부르지. 그래, 손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목 놓아 부르고 있는 거네.”


스승의 말은 계속된다. 제자가 기교로 가득 찬 곡을 발표하고, 현란한 운지법과 훔쳐간 꾸밈음을 첨가했지만, 그것은 ‘종이 위의 흑과 백일 뿐’이라고.


하얀 종이와 검은 잉크는 물질이다. 현악기와 악보 또한 물질이다. 그렇기에 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은 일회적일 수밖에 없다. 매 순간 겪는 상황에 따라 감정은 요동치고,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외부가 그의 전부를 변주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악기를 연주한다고 해서, 명명된 제목 그대로의 곡이 소리로 화하는 것은 아니다.


일견 극단적으로 보이는 스승의 악기 파괴는, 악기와 악보가 ‘음악’이 존재하게끔 하는 물질적 매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스크린샷’과 같다. 사진을 찍으면 순간이 저장된다고 믿는다. 악보에 적으면 음악이 저장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껍질일 뿐, 나비가 아니다. 통증이 사라진 생채기일 뿐, 살아 있는 순간이 아니다.


스승은 껍질을 부쉈다. 물질을 부숨으로써 비물질을 가리킨 것이다. 어쩌면 수명이 정해진 ‘물질의 소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예술혼의 고양’임을, 제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선: 스승은 왜 아내의 영혼 앞에서 연주하는가


그런데 이상하다. 청중을 위한 음악을 인정하지 않는 스승이 죽은 아내의 영혼 앞에서 연주한다. 아내가 죽은 뒤, 생트 콜롱브는 오두막에 틀어박혀 홀로 비올라를 켠다. 그 앞에 아내의 유령이 나타난다.


“당신은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 올 수 있는 거요? 내 나룻배는 어디 있소? 내가 당신을 볼 때 흐르는 내 눈물은 어디 있소? 이게 정녕 꿈이란 말이오? 아니면 내가 미친 거요? (중략) 당신을 만질 수 없어 고통스럽소.”


아내의 유령이 답한다.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다고. 바람이 되면 고통이 없을 것 같냐고. 가끔 이 바람은 약간의 음악 조각들을 실어 나르고, 가끔 빛은 우리 모습의 조각들을 던진다고.


왕 앞에서는 절대 연주하지 않던 스승이 죽은 아내 앞에서는 연주한다. 청중을 부정한 사람이 청중 앞에서 연주하고 있다.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 여기서 생트 콜롱브가 부정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거부한 것은 ‘청중’ 자체가 아니다. 그가 거부한 것은 청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음악을 수단으로 삼거나 박수와 명예를 얻기 위해 연주하는 것.


죽은 아내 앞에서의 연주는 다르다. 그 연주는 아내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서다. 그것은 일종의 부름이다. 떠나간 사람을 부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손을 뻗는 것. 스승이 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목 놓아 부르는’ 그 행위다. 아내의 유령은 음악이 자연스럽게 불러낸 것이다.



면: 부름과 응답


두 질문을 겹쳐보면 이 소설의 진짜 주제가 드러난다. 스승이 제자의 악기를 부순 이유는 음악이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악기는 부술 수 있지만, 음악은 부술 수 없다. 악보는 불태울 수 있지만, 연주하는 순간의 떨림은 불태울 수 없다. 스승은 왜 죽은 아내 앞에서 연주하는가. 음악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부르기 때문이다. 아내는 죽었고, 물질로서의 아내는 사라졌다. 그러나 스승은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연주는 사라진 것을 향한 부름이기에. 유령은 그 부름에 응답한다.


물질을 부수는 것과 비물질을 부르는 것. 이 두 행위가 하나로 연결된다. 껍질을 부수고 나비를 부르는 것. 스크린샷을 찢고 살아 있는 순간을 부르는 것. 생트 콜롱브의 음악은 그렇게 작동한다.


소설의 마지막, 늙은 스승은 홀로 중얼거린다.


“아, 나는 너무 늙어버린 그림자들하고만 말을 하고 있군. 갈 사람은 가야 하는데. 아, 만일 나 말고 음악을 아는 누군가가, 살아 있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다면! 우리가 화답을 할 텐데. 그에게 맡기면 나는 죽을 수 있을 텐데.”


스승은 그림자들과 대화해왔다. 죽은 아내, 떠난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러나 이제 살아 있는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싶다. 화답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음악은 이렇게 전해진다. 악기나 악보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름과 응답으로 전해진다. 현(絃)이 울리고, 찰음(擦音)이 공기를 가르고, 그 떨림이 다른 영혼에 닿아 다시 울린다. 껍질이 아니라 떨림이 전해진다. 기록이 아니라 생이 전해진다.



에필로그


책을 덮고 생각한다. 스크린샷은 계속 쌓일 것이다. 갤러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껍질의 더미는 높아질 것이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삶이 흐르는 한, 순간은 계속 죽고 기록은 계속 남을 테니.


생트 콜롱브는 순간을 영위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저장하려 하면 껍질만 남고, 부르면 온다는 것. 기록하면 죽고, 연주하면 산다는 것. 사진첩을 넘기는 것과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박물관이고, 후자는 강신(降神)이다.


그렇게 내 몸은 현이 된다. 떠난 나비가 다시 돌아오길 희망하면서. 삶과 글이 비벼지며 태어난 찰음을 세상에 내보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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