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는 물 속의 개구리

마크 피셔 著, 『자본주의 리얼리즘』 점선면 서평

by 고유동

프롤로그


머리로 알았든 가슴으로 느꼈든, 군대에서 오래 복무하다 보면 자연스레 품게 되는 가치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소중하고, 시장경제는 우월하다는 것.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의 뿌리가 되는 두 전제로부터 군대의 존재 목적이 도출된다. 물론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가 없다. 구체적인 방법론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거시적 관점에서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에는 좌우가 없으니까. 앞서 언급한 가치는 군인을 넘어 사실상 대한민국 국민 다수에게 절대적 명제로 기능한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나는 이런 토론 불가능한 ‘무결성’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르고, 내 마음 또한 어제와 오늘이 다른데 모두에게 늘 절대적으로 기능하는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건 형이상학적 차원의 ‘이데아’에서만 숨 쉴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오히려 무결성 바깥에서 ‘결핍’을 관찰할 수 있을 때 더욱 힘 있는 명제로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시선들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이 피어오를 때쯤,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명료하게 드러낸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읽었다.


책 소개


마크 피셔 著, 『자본주의 리얼리즘』(2018). 리시올.


비평가인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을 장악한 현재 상황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정의하고, 이 새로운 리바이어던의 지배를 깨뜨릴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정도”라는 지젝의 말을 인용하며,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ㆍ경제체제이고 이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감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민낯을 낱낱이 끄집어내는 정치ㆍ경제 비평서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 보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논의가 전개된다. 전통과 새로운 것, 사회와 개인, 감각과 무감각이라는 세 개의 대극(對極)이 교차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세계’의 형상. 피셔는 멀쩡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표정에서 미세한 ‘균열’을 읽어낸다.


나는 이 책을 두 개의 질문으로 읽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왜 미래를 낳지 못하는가에 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가 왜 이 불임의 징후를 감지하지 못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점: 자본주의는 왜 미래를 낳지 못하는가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은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세계를 그린다. 피셔는 이 영화에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핵심 증상을 읽어낸다. 영화 속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흔히 아는 종말 서사와 결이 다르다. 핵전쟁도, 좀비도, 외계인 침공도 없다. 다만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파괴적이지는 않으나 비극적이고, 일회성 붕괴가 아닌 무한히 지연되는 소멸이다.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청년들이 더 이상 놀라움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피셔의 진단은 이렇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에서 문화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 모더니즘은 “주기적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그러나 결코 삶의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얼어붙은 미학적 스타일로서만 되돌아올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다. 과거의 스타일은 반복되지만,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박제다.


왜 그런가? 피셔는 자본주의가 새로움을 억압해서가 아니라, 새로움을 ‘사전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항과 논쟁의 몸짓들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허용된 제스처다. ‘대안적’ 또는 ‘독립적’ 문화 지대가 확립되어 있는 곳에서조차, 저항은 시스템을 위협하지 않는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은 매번 ‘악한 기업’으로 판명나지만, 이런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한다.


불임. 괴사.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증상들이다.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않는다. 무언가 태어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이미 죽은 스타일의 재조합일 뿐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미래는 도래하지 못한다. 현재가 무한히 변주되며 증식할 뿐이다.



선: 사회는 왜 이 불임을 감지하지 못하는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불임이고 괴사인데, 왜 아무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가. 왜 사회는 이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하는가. 피셔의 답은 명료하다.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지해도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정신 질환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면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게 된다. 첫째, 원자적 개인화를 향한 자본의 추진력을 강화한다. 둘째, 다국적 제약 회사에 엄청나게 수익성 높은 시장을 제공한다.”


우울증은 시스템의 결함이 아니라 개인 두뇌의 화학 작용 문제로 처리된다. 불안은 구조의 폭력이 아니라 개인의 적응 실패로 진단된다.


피셔는 이것을 ‘스트레스의 개인화’라고 부른다. 지난 30년간 진행된 광범위한 개인화. 그 결과 사회 체계의 인과 관계에 대한 어떤 물음도 배제된다. “그토록 많은 사람, 특히 그토록 많은 청년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묻히고, 대신 “당신은 왜 적응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만 남는다.


감각이 무뎌진 것이 아니다. 감각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사회를 향해야 할 시선이 개인 내부로 굴절된다. 분노해야 할 곳에서 자책하고, 저항해야 할 곳에서 치료받는다. 정서적 장애들은 불만이 내면에 갇혀 있을 때 발생한다. 외부로 향해야 할 것이 내부에서 곪는다.



면: 끓는 물 속의 개구리


두 질문을 겹쳐보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작동 방식이 드러난다. 자본주의는 미래를 낳지 못한다.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회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왜? 감지한 순간, 그것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무결하고, 문제는 당신에게 있다. 이 기괴한 논리가 무한 반복된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면 개구리는 뛰쳐나오지 못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갑자기 우리를 지배하지 않았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스며들었다. 피셔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어떤 만연한 분위기’다.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


저항할 수 없다는 확신이 핵심이다. 자본주의가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순응한다. “대안은 없다”는 관념. 투쟁은 의미가 없으며 우리는 그저 적응해야 한다는 체념. 이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심리적 기반이다.


개구리는 물이 끓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뛰쳐나갈 곳이 없다고 믿는다. 바깥이 존재한다는 상상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피셔는 진단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면화된 고통을 다시 외부로 돌리는 것. 개인의 문제를 다시 사회의 문제로 재구성하는 것. 이것이 그가 제안하는 돌파구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아픈가? 이 질문을 개인에게 돌리지 말고 시스템에 돌려야 한다. 끓는 물의 온도를 측정해야 한다. 그리고 밖이 없다는 믿음에 균열을 내야 한다.



에필로그


책을 덮고 나는 다시 ‘무결성’의 빈틈을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또한 ‘무결’할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일까. 모든 문제의 근원을 ‘자본’으로 압착시키는 그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복잡계 네트워크에서는 ‘자본’이라는 시스템조차 행위자로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배웠다. 계(界)의 외부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문제를 제기하며 대안을 탐색하는 메타적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토론 불가능한 절대적 명제들. 그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실 이 명제들을 옹호한다. 하지만 무결성 안에 갇히면 결핍을 볼 수 없다. 결핍을 보지 못하면 갱신할 수 없다. 갱신하지 못하면 괴사한다.


나는 아직 끓는 물 속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온도를 느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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