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 著,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서평
자신의 견해를 절대적 진리인 양 강요하는 사람들을 본다. 좌파와 우파, 광신자와 무신론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더 나아가 모두 옳다는 ‘양시론’과 모두 틀렸다는 ‘양비론’까지. 하나의 직선에서 두 개의 점을 이루는 그들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에서 배수진을 치고 있다. 그들 모두가 상대에게 말하기를 강요한다. 침묵을 비겁한 행태로 간주한다. 이 세계에서 교집합은 타도해야 할 적이다.
알고리즘은 개인의 선호에 따라 취향을 선별하여 큐레이팅하고, 우리는 반향실에 갇혀 똑같은 메아리만 듣는다. 그리하여 왼쪽과 오른쪽은 격리된다. 각각의 점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덩치만 키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21세기에 이르러 실현되는 풍경. 홀로 돌아가는 육중한 톱니바퀴 속에서, 내가 조용히 깎여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이 책을 만났다.
슈테판 츠바이크 著,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2024). 다산초당.
소설가이자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남긴 미공개 에세이다. 세계대전이라는 어두운 시절을 온몸으로 살아낸 그가 독일 나치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을 떠난 시절 남긴 기록. 작가는 폐허 속에서 발견한 꽃으로 산문을 썼다.
이 책은 겉보기에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위로 에세이다. 그러나 한 꺼풀 뒤집어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전쟁 중인 나라의 처참한 현실이 잿가루처럼 눈앞에 아른거리고, 화약 냄새가 시간을 가로지른다. 그러나 담담하다. 이런 건 일상이라는 듯, 작가는 편의점에 껌 사러 가는 아이처럼 동시대를 쓰고, 스포트라이트 너머의 사람을 말하며 희망을 전한다.
나는 이 책을 두 개의 질문으로 읽었다. 하나는 작가가 왜 무감각한 사람들을 변호하는가에 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독재 권력이 어떻게 침묵을 강제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열한 편의 에세이에 공통으로 흐르는 정서가 있다. 바로 ‘무감각’이다. 돈에 초연한 부랑자, 상처 입은 친구를 붙잡지 않은 친구들, 역사적 사건을 외면하는 낚시꾼들, 세계대전의 충격적인 보도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은 그들을 비난한다. 냉담하다고, 이기적이라고, 무책임하다고. 그러나 츠바이크는 묻는다. 이들은 정말 ‘무감각’한 걸까?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역사적 시대’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고, 우리의 마음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잠시 떠나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선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로봇이 아닌 한에야 감각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담아낼 그릇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전쟁이 일상인 세계. 오늘은 만 명이 사라지고, 내일은 수십만 명이 사라진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순 있지만, 그것이 수년간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다. 살기 위해서는 줄을 느슨하게 만들어야 한다. 감각이 무뎌져야 숨을 쉴 수 있다.
작가는 이것을 이해한다. 아니, 그 자신이 그랬을 것이다. 매일 들려오는 참극의 소식 앞에서 그도 때때로 감각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감각한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의 침묵을 비겁함으로 몰아세우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한 무감각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런데 질문을 바꿔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사람들이 무감각해진 것인가,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것인가.
권력은 효율적인 집행을 위해 매끄러워야 한다. 완연한 ‘구(球)’의 형상이 되어야 하므로 툭 튀어나온 모든 돌기를 사포로 긁어낸다. 히틀러는 이를 충실히 수행한다. 반대의견을 프레스로 압착하고, 나노 단위의 차이조차 그라인더로 갈아낸다. 숨을 분쇄하고 호흡을 틀어막아 세계를 무중력상태로 만든다. 우주 공간이 그러하듯 1940년대를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침묵. 뚫을 수 없는 침묵, 끝없는 침묵. 나는 그 침묵을 밤에도 낮에도 듣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로 내 귀와 영혼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어떤 소음보다 견디기 힘들고, 천둥보다, 사이렌의 울부짖음보다, 폭발음보다 더 끔찍하다. 그것은 비명이나 흐느낌보다 더 신경을 찢고 더 슬프다. 수백만 사람이 이 침묵 속에서 억압받고 있음을 나는 매 순간 깨닫는다.”
침묵은 선택이 아니다. 강제다. 말할 수 있는 자가 침묵하는 것과 말할 수 없게 된 자가 침묵하는 것은 다르다. 독재는 목소리를 빼앗는다. 반대할 수 있는 공간을 없앤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침묵뿐이다. 그 침묵을 우리는 ‘무관심’이라 부르고, ‘냉담’이라 부르며, ‘비겁’이라 부른다. 그러나 작가는 안다. 그 침묵 속에 수백만의 억압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두 질문을 겹쳐보면 이 책의 진짜 주제가 드러난다.
사람들은 왜 무감각한가. 감당할 수 없어서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왜 침묵하는가. 말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무감각과 침묵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증상이다.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그러나 츠바이크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듣는다. 무감각 속에서 무언가를 본다.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어두워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이, 밤에는 보인다. 시끄러울 때는 들리지 않던 것이, 침묵 속에서는 들린다. 작가는 침묵을 듣는 사람이었다. 무감각 속에 숨겨진 고통을, 냉담 속에 감춰진 절망을 보는 사람이었다. 스포트라이트 너머를 응시하는 일. 가려진 것이 조용하다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침묵을 강요받는다. 알고리즘이 반향실을 만들고, 반대의견은 차단되며, 양극단만이 목소리를 갖는다. 중간에 선 사람들, 아직 생각 중인 사람들, 복잡해서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말해도 들리지 않아서다. 말해도 왜곡되기 때문이다. 말하면 어느 한쪽의 적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1940년대에 들었던 침묵이, 2026년에도 들린다.
츠바이크는 폐허 속에서 꽃을 보았다. 침묵 속에서 억압을 들었다. 무감각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을 읽었다. 그리고 그것을 썼다. 그의 에세이들은 위로의 글이 아니다. 아니, 위로이되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침묵하는 자들을 위한 변호이고, 무감각한 자들을 위한 이해이며,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별에 대한 증언이다.
나는 아직 침묵 속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안다. 침묵이 비겁함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무감각이 냉담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어두워져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