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심채경 著, 『과학산문』 점선면 서평
사과와 양말의 차이는 북극과 남극의 거리만큼 선명하다. 그렇다면 빨간색에 단단한 과육을 지닌 ‘홍로’와 ‘부사’는 어떨까. 아마 부산에서 제주도의 거리 정도쯤 될 것 같다. 그럼, 마지막 질문. 같은 과수원 첫 번째 나무의 사과와 두 번째 나무의 사과는 어떨까. 질문이 이어질수록 경계는 흐릿해지고 이내 아득해진다. 지독한 근시가 느릿느릿 안경을 벗는 것처럼.
‘분해능(分解能)’은 아주 작은 차이를 분별해 내는 기기의 능력을 말한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의 제원에서 자주 등장하는 낱말이다. 분해능이 좋으면 확대해도 선명하게 보이지만, 나쁘면 화질이 깨진다. 전문가가 전문가인 이유는 자신의 분야에 관한 분해능이 좋아서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 같다고 보는 것에서 ‘차이’를 발견한다. 이 사과가 저 사과와 다른 이유를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조금씩 달라 보이는 사과가 왜 같은 계통으로 묶이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결’을 볼 줄 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허우적거릴 무렵, 나는 나와 연결된 관계의 ‘결’을 보고 싶었다. 매일 만나는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장소, 비슷한 대화의 늪에 빠져 나는 질식하고 있었다. 숨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사과와 양말을 구별하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홍로’와 ‘부사’ 정도는 가려야 했다. 그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김상욱ㆍ심채경 著. 『과학산문』(2025). 복복서가.
물리학자와 천문학자가 두 계절에 걸쳐 편지로 나눈 대화다. 동명의 유료 이메일 구독 서비스에 연재한 글을 담은 책. 두 작가는 물질의 근원을 탐구하는 물리학과 아득한 우주를 탐구하는 천문학을 기반으로 일상의 풍경을 직조하여 글로 풀어냈다. 과학자가 산문을 쓴 것인지, 산문가가 과학을 인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경계에서 ‘경직(硬直)’은 유명무실해지고 ‘유연(柔軟)’이 피어오른다. 엄밀함을 요구하는 과학자들의 결론이 ‘모호함’이라는 아이러니. 그러나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인간이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겉보기에 이제 막 친구가 된 과학자가 우정을 쌓기 위해 나눈 필담이다. 그러나 속은 단순하지 않다. 자장면에서 물리를 논하고, 코인빨래방에서 우주를 본다. 전문 분야의 예리한 분해능으로 삶을 들여다본다. 그것을 대척점에 있는 타인의 삶과 교차시킨다. 나는 이 책을 두 개의 질문으로 읽었다. 하나는 두 과학자의 시선은 무엇이 다른가에 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다른 시선이 어떻게 만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물리학자는 물질의 근원을 찾아 세상을 잘게 쪼개어갑니다. 하지만 천문학자는 가장 거대하고 너무 멀리 있어 직접 가보기 어려운 세상을 다룹니다.” ― 김상욱
물리학은 축소한다.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쿼크로. 나노의 세계, 양자의 세계로 파고든다. 김상욱은 자장면 한 그릇에서 면발의 탄성을 논하고, 단무지에서 치아의 반발력을 떠올린다. 그의 시선은 눈앞의 것을 쪼개어 그 안에 숨겨진 법칙을 찾아낸다. 점에서 출발하여 점 안으로 들어간다.
천문학은 확장한다. 지구에서 달로, 태양계에서 은하로. 광년과 파섹의 세계로 뻗어나간다. 심채경은 코인빨래방에서 중력장을 상상하고, 빨래가 도는 세탁기 안에서 은하의 고요를 듣는다. 그녀의 시선은 눈앞의 것을 넘어 저 너머의 것과 연결한다. 점에서 출발하여 면으로 확장한다.
둘의 출발점은 같다. 일상이다. 그러나 방향이 다르다. 하나는 안으로, 하나는 밖으로. 흰색이 검정을 향해 나아가고, 검정이 흰색을 향해 나아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정반대로 향하던 두 시선이 어느 순간 만난다. 쪼개고 쪼개던 물리학자가 결국 마주하는 것은 “모른다”는 겸손이고, 확장하고 확장하던 천문학자가 결국 마주하는 것도 “모른다”는 겸손이다. 극소와 극대의 끝에서, 두 과학자는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방향이 다른 시선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이 책의 형식이 그 비밀을 품고 있다. 편지다. 주고받는다. 한쪽이 말하면 다른 쪽이 듣고, 듣던 쪽이 다시 말한다. 물리학자의 자장면이 천문학자의 빨래방으로 이어지고, 천문학자의 밤하늘이 물리학자의 양자역학으로 되돌아온다.
시선은 빛과 같아서, 대상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돌아오는 빛이다. 빛을 보내기만 하면 독백이다. 빛이 돌아와야 대화가 된다. 김상욱이 쓴 글은 심채경에게 닿아 그녀의 시선으로 굴절되어 돌아온다. 심채경이 쓴 글은 김상욱에게 닿아 그의 시선으로 굴절되어 돌아온다. 이 굴절의 반복 속에서 두 시선은 서로를 닮아간다.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속해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합니다. 나라는 물방울이 이 물방울에도 접하고 저 물방울에도 접해서, 서로 다른 방울방울의 표면장력을 한데 모아 최소화하는 장면을, 그래서 내가 더 큰 물방울이 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 심채경
심채경이 말한 “물방울”의 비유가 정확하다. 물방울이 물방울에 닿으면, 표면장력이 재조정된다. 각자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더 큰 물방울이 된다. 그러나 원래의 물방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합쳐지되 녹아버리지 않는다. 두 과학자의 대화도 그렇다. 물리학이 천문학이 되는 것도, 천문학이 물리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닿아 있다. 닿아 있으면서 더 커진다.
두 시선을 겹쳐보면 이 책의 진짜 주제가 드러난다.
물리학자는 쪼개고, 천문학자는 확장한다. 그러나 둘 다 결국 “모름”에 도달한다. 극소의 끝에서도, 극대의 끝에서도, 세계는 여전히 미지다. 분해능을 아무리 높여도 더 작은 것이 나타나고, 망원경을 아무리 멀리 돌려도 더 먼 것이 나타난다. 과학은 답을 주지 않는다. 더 정교한 질문을 줄 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두 과학자가 도달하는 곳은 과학 바깥이다. 김상욱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도달한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의미를 묻지 않고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 심채경은 ‘이상은’의 노래 「언젠가는」에 도달한다. 과학적 태도로 세상을 보되, 그 시선의 끝에서 만나는 것은 인간이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해능을 높여 차이를 식별하는 것인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차이를 본 뒤에,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물방울이 물방울에 접하듯, 나의 표면장력이 타인의 표면장력과 만나 더 큰 물방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제대로 보는 사람은 타인과 포개어진다.
관계의 ‘결’을 보고 싶어서 이 책을 펼쳤으나 조금 다른 것을 배웠다. 결을 보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결을 본 뒤에, 다른 결과 닿으려고 손을 뻗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두 과학자가 보여준 것이다.
나는 아직 분해능이 낮다. ‘홍로’와 ‘부사’를 겨우 구별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제 안다. 구별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구별한 뒤에 다시 연결하는 것, 차이를 본 뒤에 그 차이를 가로질러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라는 것을.
책을 덮고 창밖을 본다. 저 건물과 이 건물은 다르다. 그러나 닿아 있다. 나와 타인도 다르다. 그러나 닿을 수 있다. 물방울이 물방울에 접하듯. 그것은 나이고 너이며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