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 속에서 연명하는 기술

김훈 著, 『칼의 노래』 점선면 서평

by 고유동

프롤로그


쥐 죽은 듯 고요한 새해가 나를 덮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던 전화벨은 안부와 광고 사이를 헤매다 자취를 감췄다. 대체 어느 곳으로 사라졌는지 모를 무심한 공백이 나는 좋았다. 앙상한 겨울과 제법 잘 어울려서, 비루함을 가리기 위해 제작된 ‘새날’이 오히려 그것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나는 길잃은 울음을 귀에 꽂고 오래된 안부를 반복해서 들었다.


이름 모를 공회전이 시시각각 삶을 마모시키는 가운데 나는 이순신을 떠올렸다. 호국의 영웅이 아닌 고뇌의 인간. 배워서 알게 된 ‘그’는 널리 알려졌으므로 내게 의미가 없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개별화된 ‘그’였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배회하던 그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책 소개


김훈 著. 『칼의 노래』(2012). 문학동네.


모두가 아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이다. 그가 백의종군을 시작할 무렵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의 삶. 여기에 당시 국제정세와 소설적 상상을 배합하여 다큐멘터리처럼 복원했다. 소설과 다큐. 이 모순된 지점에서 이 책의 결을 느낄 수 있다. 모순은 극단을 전제한다. 직선을 규정하는 두 개의 점. 그것은 삶과 죽음이고, 보편과 개별이면서 이순신과 독자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별처럼 먼 곳의 역사였을 뿐인 그때와 지금을 접붙인다. 모래처럼 흩뿌려진 타인과 타인을 엉겨 붙게 한다.


이 소설은 겉보기에 전쟁의 기록이다. 칠천량의 참패, 명량의 기적, 노량의 최후. 그러나 김훈이 정작 기록하고 싶었던 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명료한 것이 아닌 흐릿한 것. 전투와 전투 사이, 승리와 승리 사이에 웅크린 한 인간의 고독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두 개의 질문으로 읽었다. 하나는 이순신을 향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신을 둘러싼 세계를 향한 질문이다.



점: 왜 이순신은 죽음을 각오했는가


이순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과 삶 사이에서 이미 삶 쪽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인다. 서울로 압송되는 함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죽음은 절벽처럼 확실했다. 다만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문과 문초가 길지 않기를 바랐다. 죽여야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나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노량해전을 앞두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히데요시의 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무력이 안개처럼 증발된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문장을 읽으며, 나는 ‘연명’이라는 낱말을 간신히 떠올렸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것. 이순신은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 겨우 이어 붙일 뿐이다. 왜 그런가. 그는 싸워서 이겨도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조정은 그를 의심하고, 임금은 그를 시기하며, 동료 장수들은 그를 경계한다. 승리는 그의 것이 아니라 임금의 것이고, 패배만이 온전히 그의 것이다. 이기면 시기받고, 지면 죽는다. 이 함정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순신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적과 싸워야만 생(生)에 속할 수 있었으므로, 전쟁이 지속되는 순간만 죽음을 유예받은 것이기에. 그는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생사(生死)를 제쳐둔 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한 것이 아니었을까. 노량에서 적의 총탄에 맞았을 때, 유언 대신 전황을 걱정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설 속 이순신의 독백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나는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면 나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선: 이순신의 죽음을 원하는 적은 누구인가


이순신을 죽이려는 것은 왜군만이 아니다. 소설을 읽으면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이순신의 또 다른 적은 바다 건너가 아니라 바다 이쪽에 있다.


조정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옥에 가둔다. 왜군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빌미로. 그가 싸워서 지킨 나라가 그의 손에 형틀을 채운다. 왜 그런가. 이순신이 너무 유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가 임금의 무능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임금은 전쟁을 막지 못했고,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명나라에 구원을 빌어야 했다. 그 수치를 이순신의 승리가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명나라 장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순신의 전공(戰功)을 빼앗고 싶어 한다. 이순신이 이기면 명군의 전공이 흐려진다. 그래서 명군은 이순신을 방해한다. 승리를 지연시키고, 그의 요청을 무시한다.


왜군이 그를 죽이려 한다. 아군과 응원군이 그를 죽이려 한다. 더 나아가 고질병이 그를 죽이려 한다. 이것이 소설이 그려내는 이순신의 진짜 전쟁터다. 칼이 향하는 곳은 적의 함선만이 아니다. 그를 파멸시키려는 모든 방향이다.



면: 사면초가, 거대한 무의미, 그것이 곧 삶


두 질문을 겹치면 『칼의 노래』의 진짜 주제가 보인다. 이순신은 삶과 죽음의 양면을 생각한다. 그 아득한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에 적군이 있고 아군과 우군이 있다. 왜군, 명군, 임금과 조정, 심지어 역사 자체가 그를 소모하고 지워버리려 한다. 사방이 그를 겨냥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멈추지 않는다. 열두 척의 배로 삼백 척을 막는다. 아무도 믿지 않는 바다 위에서 홀로 싸운다.


왜?

승리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남아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훈이 그려내는 이순신의 대답은 이것이다. 의미 따위는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적선이 다가오고, 칼을 뽑아야 하고, 휘둘러야 하고, 베어야 한다. 내일은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이 일.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대한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지 않고, 무의미 자체를 살아내는 것.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 보상이 없으므로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김훈의 문장이 짧고 건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미래를 향해 뻗어가는 문장, 의미를 설명하려는 문장은 이순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삶은 지금 이 순간에 갇혀 있고, 문장도 그래야 한다. 마침표가 찍히면 끝이다. 다음 문장은 다른 세계다.



에필로그


책을 덮고 다시 고요한 새해 앞에 섰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지지부진했고 여전히 덧없어 보였다. 그러나 덧없음이 곧 무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이순신에게서 배웠다. 아니, 무의미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이순신은 노량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직전까지 한 일은 싸우는 것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의 투쟁. 그렇게 그는 죽어서 살았다. 마모되었으나 부스러기는 남았다. 그는 멈췄고 나는 움직인다.


나는 아직 싸우는 중일까.

이 질문이 책을 덮고도 떠나지 않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