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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May 08. 2024

자기 착취의 덫

[문학고을] 61회 신인 문학상 수필부문 수상작품


고백하건대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은 외향적인 성격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만,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했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말해야 했으며, 가만히 있고 싶지만 다양하게 활동해야 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하는 상황이 제일 힘든 일이었다. 마음과 몸은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언제나 반대로 행동한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이라는 건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 본성을 거스르는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성격은 바뀌지 않더라도 몸은 그것에 적응하는 듯하다. 외향적인 일들을 그럭저럭 잘해 내온 걸 보면 말이다. 아니면 내상(內傷)을 계속 누적시키면서, 외피(外皮)를 단단하게 만들었던 걸까. 이를테면 내부는 시커멓게 타서 재만 남고, 껍질만 덩그러니 남은 상태.  

   

껍질을 떠올린다. 파충류의 탈피는 성장을 위한 것이고, 포유류와 조류의 탈피는 체온조절이라는 명확한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생명이 빠져나간 껍질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탄생을 촉진했다는 숭고한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나의 탈피를 생각해 본다. 껍질은 내부의 존재로 인해 의미가 있는 것. 내부의 생명을 빨아들임으로써 내부를 죽이고, 자기 자신을 강화한 껍질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돌연변이? 아니면 키메라? 그 이질적인 존재를 ‘나’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이름이야 어찌 불리든 ‘최초의 나’를 대체한 그것은 마치 ‘가면’과 같다. 가면은 사실 ‘자기 착취의 덫’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소진하는 덫. 언제부터 나는 가면을 쓰기 시작한 걸까. 불현듯 떠오르는 생경한 의문과 이어지는 미스터리에 소름이 돋는다. 인간의 궁금증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기억을 모두 탐색하여 인과적 설명이 가능하도록 삶을 재구성한다. 그 치열한 과정은 어느 기억에 멈춰 선 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예를 들면 딸과 함께하는 역할놀이의 기억.     


한때 우리 딸은 콩순이 유튜브 영상에 흠뻑 빠져있었다. 이 영상이 뭔고 하니, 콩순이와 친구들이 등장해서 주방놀이 장난감을 가지고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드는 영상이다. 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콩순이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영상이 끝나자마자 집에 있는 주방놀이 세트로 실습을 한다. 민트색 주방에서 지지고 볶고 음식 만드는 시늉을 하고 작디작은 탁자에 밥상을 차려준다. 알록달록한 구슬 밥과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과일들이 예쁜 접시에 담겨있는 모습. 그걸 낑낑대며 탁자에 세팅하는 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네 살짜리가 아빠 밥상도 차려주다니, 놀아주느라 피곤한 건 별개로 기특함이 앞선다. 딸이 요리사를 하면 나는 손님을 하고, 내가 요리사를 하면 딸은 손님을 한다. 너무 피곤하지만, 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만둘 수도 없었다. 이렇게 역할놀이는 삶을 미리 체험하는 교육의 현장이 된다. 인간이 역할놀이를 한다는 건 본능처럼 느껴진다. 험난한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시행착오도 미리 겪고 사회성도 기르라는 유전자에 각인된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내 얼굴에 덧씌워진 차가운 가면의 감촉이 느껴진다. 이게 언제부터 씌워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내 얼굴과 가면은 하나가 되어버렸다. 본래의 얼굴을 잃어버린 나는, 역할이 정해진 가면을 쓰고 가면이 만족할 만한 일을 한다. 세슘 원자로 작동하는 시계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가면의 숙명을 이행하는 나. 평생을 역할놀이에 몰입하다 보니 진짜 얼굴을 잃어버렸다. 상실에서 비롯된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진다. 환상통처럼. 


나는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방황한다. 가면이란 자기 착취의 덫이 내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가면 자체가 나일까. 나는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유하고 말하며 자신을 소진한다. 재만 남을 때까지. 그러므로 내면을 탐구하는 일은 자신을 불태우는 일과 동의어이다. 껍질은 멀쩡하나 속은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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