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모래의 여자 | 결핍과 갈증,

by 무화


구멍 파기를 좋아한 시절이 있었다. 모래밭을 파헤치며 저어 아래를 계속 파내려가면 어떤 세상이 나오려나 진심으로 궁금했던 어린 무화.

파헤친 김에 구멍 속에 무언가를 넣어두고 잠복하기를 즐겼다. 그 무언가가 계속 존재할지, 또는 누군가가 괴성을 지를지 정성 들여 상상했다. 구멍 속엔 늘 이야기가 넘쳐났으니까.



여전히, 불가해한 구멍들에 골똘하다.

여전히, '나'는 덫을 놓는 쪽인지 걸려드는 쪽인지 의문을 갖는다.

여전히,..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도 밀어 올리며 생을 버틴다. 무의미한 의미에 無를 덧씌우며.



꽤 오래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시간이 내 옆을 흐르고 있다. 내가 통과하거나 쪼개거나 부수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시간이라는 관념이 사구속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가라앉고, 흩어져가는.

나는 침잠과 발버둥, 눈 가리고 아웅 하기 등의 기술을 번갈아 시전 하며 둥둥 떠다녔다. 때로 빛을 발하면서. 심해의 발광 해파리니까.



무망하게 무용한 무기력 속에 방기할 수만은 없어서 압축과 모호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덩어리로 나를 텍스트화시켰다.

시인.

부끄러웠다.



4개월 만에 다시 책을 읽었다.



대단히 쪼그라들었다.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좋다.






《모래의 여자》 아베 고보


프란츠 카프카 ─ 《소송》
아베 고보 ─ 《모래의 여자》
사무엘 베케트 ─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윌리엄 포크너 ─ 《소리와 분노》
알베르 카뮈 ─ 《이방인》
로베르트 무질 ─ 《특성 없는 남자》

20세기 세계문학들 중 가장 불편하고 불가해한 소설들일 거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이해·공감·판단의 통로를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독자가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굳이 굳이 이 작품들을 읽는다.
의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불편함을 통과하기 위해서다.
왜?

불편한 소설은 독자가 익숙하게 사용하던
이해와 공감, 판단의 방식을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이야기의 바깥에서 평가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구조 안에서 흔들리는 존재가 된다.

이 불편함이야말로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몹시도 징그러운 사유,



일본의 카프카?

문제 작가 계보에서의 '아베 고보'

아베 고보는 이유를 이해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인간을 그린다.


자유는 점차 유지되지 않는다.
자유가 소멸하는 지점이 아니라,
자유가 관리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폭력은 부재하고, 조건만 존재한다.
명령은 없고, 필요만 작동한다.
인물은 성격이 아니라 기능으로 배치된다.
그의 소설에서 억압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삶을 유지하려는 합리성의 결과로 나타난다.





요약하기 쉬운 이야기다.


곤충 채집을 하러 온 남자는 모래 구덩이 속 집에 남게 되고, 모래를 퍼내며 생활하게 된다.
탈출은 불가능하지 않으나 계속해서 유예된다.
감금의 이야기가 아니라, 적응이 합리화되는 과정을 기록한 기묘하고 기괴하고 모래알처럼 까끌거리는 작품.



허나, 대량의 질문을 양산한다.

동시에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고민하게 한다.


모래가 무얼 은유하는지, 어쩌자고 저 모양 저 꼴로 저기 사는지. 메타포와 알레고리 어디에 중심축을 둘 지, 시시포스를 모셔올지. 지난한 쇄사를 밀어 올리는 스토너를 소환할지. 하다못해, 비누 거품을 어쩜 그리 맨손으로도 잘 만드는지(진심어린 !)





얘들아, 주인공이 누구일까?

왜 작가는 이걸 제목으로 정했을까?


수업시 흔히 하는 질문이다. 저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의 눈이 꽤나 반짝인다. 우리도 한 번 반짝거려 보십시다. 초심으로 돌아가 제법 근본적으로 결핍과 갈증이라는 요소를 넣어.


‘왜 여자지?’라는 질문은 단순한 제목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이 작품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그리고 결핍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아님, 말고)




서사는 남자를 따라간다.

그는 갇히고, 탈출을 시도하고, 결국 남는다.

겉으로 보면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사건을 진행시키지 않는다.

모래는 계속 쌓이고,

그것을 퍼내는 노동은 반복된다.

변화 대신 지속되는 상태,

그 상태는 해소되지 않는 결핍의 구조다.

이 구조 안에서 남자는 명확한 결핍을 가진다.

그의 결핍은 단순한 생존 조건이 아니다.


바깥에서 그는 곤충을 채집하고 이름을 붙이며

외부의 기준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구덩이에 들어오면서 그 기준이 완전히 끊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존재를 외부에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이 결핍은 곧 갈증으로 이어진다.


탈출을 시도하고, 실패하면 다른 방식을 찾고, 결국에는 물을 만들어낸다. 중요한 건 그가 결핍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신 결핍을 다루는 방식을 바꾼다.

갈증은 사라지지 않고, 방향만 이동한다.





여자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르게 놓여 있다.

그녀 역시 물이 부족하고, 노동이 반복되는 조건 속에 있다. 그러나 이 결핍은 더 이상 갈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다른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는다.

결핍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결핍이 더 이상 문제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다.



따라서 두 인물의 차이는 이렇게 정리된다.



남자 : 결핍을 인식하고, 갈증을 생성하며, 방식을 갱신하는 존재(외부 기준의 단절이 핵심 결핍)


여자 : 결핍을 전제한 채, 그것을 문제로 삼지 않는 상태(가능성 자체의 소거가 핵심 결핍)


이 차이는 구조적으로 기능한다.

남자는 이 반복 구조 안으로 들어온 변수이고,

여자는 그 구조를 성립시키는 조건에 가깝다.

남자는 움직이고,

여자는 유지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겨냥하는 것은

결핍에 반응하는 주체가 아니라 결핍이 지속되고, 더 이상 갈증으로 번역되지 않는 상태다.

그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구현하는 쪽이 여자다.

따라서 제목은 남자를 따르지 않는다.




모래의 여자



결핍과 갈증을 오래 더듬었다.

모래의 여자가 될지, 남자가 될지



주인공은 누구일까.







● 1월 도서 : 모래의 여자ㅡ아베 고보
● 1월 영화 : 모래의 여자ㅡ아베고보 각본




Cinema Reading Enjoy Artistic
Moment 크림북클럽 2026년 1월


절대 도망치지 못할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를 상자에 넣고 핀을 박아 넣는 행위.
무어든 썩게 만드는 모래 속에 굳건히 남아 자신에게도 핀을 꽂는 남자.
핀..
여자는 자궁 외 임신이라는 극적인 사건과 함께 비자발적 탈출을 한다. 핀박기는 어긋난 셈이다. 결국, 남자의 채집은 실패로 돌아가고 자신이 채집된다.
곤충에 핀을 꽂는 행위는 단순한 채집이 아니라 대상을 고정하고, 통제하고, 소유하는 행위다. 모래의 여자 안에서는
이 구조가 여자에게 그대로 겹쳐진다.
도망칠 수 없는 상태의 타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두는 방식.
이때 행위는 직접적인 성행위라기보다
지배와 소유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이고,
그 욕망이 성적인 긴장과 겹쳐 읽힌다.
핀을 꽂는다는 건 죽이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를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다.

주민들의 가면.
그들의 관음적 시선은 파리 대왕의 성애와도 같은 살육 장면과 겹친다.
오이디푸스적 곤충 채집..
전복되는 뫼비우스의 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