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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나 Jan 27. 2024

부끄러운 시인

S의 말에 따르면 그때 나는 은은하게 돌아 있었다 (여전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끼던 머리끈을 도둑맞았고

그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그걸 훔쳐 가는 걸 봤다고 했다 도대체…

나도 이해할 수 없지만

훔쳐 가는 걸 봤다고 말해준 사람이 더 싫었다


일단 차를 마셔야지

시를 쓰려면

안정이 필요하다


사람이 싫다 싫다 말해도

가난한 내가 가장 싫다

누가 나더러 뭐 하냐고 물으면

아, 저는 시를 써요 고상하게 말할 수도 없고

말한다 해도 시집이 없으니 도태된 기분이다

멋쩍은 웃음을 짓게 만들어 죄송하다 말하고 싶어진다

내가 먼저 시작한 것도 아닌데


당시 나는 멸망을 지지했다

아니 멸종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한텐 그게 그거겠지만

새벽예배를 하러 갔다


며칠은 배탈 때문에 나갈 수 없어

새벽기도 하는 법을 검색했다

지식인에 이런 답변이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새벽 기도회 나가게 해 달라고"


제발…

어설픈 신앙은 일찍이 때려치울 줄도 알아야 한다


불안을 씻어내려고 샤워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S는 내게 물 냄새가 난다고 했다 좀 지나치게

내 상태는 더 나빠진다

누구도 그만큼 물을 쓸 자격이 없어서

S도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제발…


쓰다 보니 동요되어

차를 홀짝이고 있다

불안정해도 시는 써진다

마음에 안 들 수 있겠지만

내가 지지할 수 있는 건 시 쓰는 나뿐이다…


세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한 편을 썼는데

뒤에 있던 해가 왼쪽으로 기울어 왼뺨이 붉어져 있었다

반대 뺨도 내주려고 자리를 옮겼다


사실대로 말하면 지구가 기울어서 왼뺨이 붉어졌고

이 말은 내가 굉장히 지구인 같다는 인상을 준다

누가 나더러 뭐 하냐고 물으면

지구인이요 답변하고 싶다

그럼 나처럼 때려치우겠지


S도 나와 같은 지구인이다

이럴 때 지구가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멀리 있어도 우리가 같은 지구인이라는 것이…


지구에서도 이만큼 울적한데

외계생명체를 몰라 참 다행이지


지금 S의 견해를 들을 수 없지만

여전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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