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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푸름 Jul 22. 2021

피망은 말이 없습니다.

에드워드 웨스턴 <피망 No. 30>

에드워드 웨스턴 Edward Weston, <피망 No. 30 Pepper No. 30>, 1930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웨스턴의 <피망 No. 30>이라는 사진입니다. 제목 그대로 피망을 찍은 사진이지요. 일반적인 피망보다 조금 더 찌그러져서 못생긴 피망이네요. 그러나 이 피망의 형상 속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비틀어진 신체의 모습입니다. 조금 웃기지 않나요? 피망은 아무런 가치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아무런 가치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메라에 담긴 피망을 보고서 사람들은 가치를 담으려 합니다.


 저 역시도 가치를 담으려 했습니다. 아니, 담으려 했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저는 이미 이 사진을 보고서 가치를 담고 있었습니다. 피망이 사람의 등을 흉내내려 했을 이유는 전혀 없죠. 그렇지만 저는 이 사진을 보고서 몸을 웅크리고서 괴로워하며 팔로 머리를 누른 채 온몸을 배배 꼬고 있는, 근육이 돋은 한 인간의 등을 발견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랬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제 자신에게 냉소를 선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피망에 말입니다. 사람의 등을 발견하려 했다는 것이요. 그것도 괴로움에 가득 찬. 물론 발견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결코 사람의 등은 아니니까요. 피망은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괴로워하지요. 그렇지만 피망에게는 감정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이, 제가 피망에 가치를 개입하는 일을 중단하게 함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매끄러운 피망의 모습은 괴로워하는 신체의 형상에 연결되었고, 흑백사진의 어두운 분위기와 함께 저는 노래 하나를 떠올리기까지도 했습니다.


Joji - SLOW DANCING IN THE DARK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정직한 ‘피망 사진’ 한 장과, 그곳에서 자꾸만 무엇인가를 발견하려 하는 우리의 인식. 피망은 말이 없습니다. 피망은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를 괴롭게 할 뿐입니다.




*작품 정보

에드워드 웨스턴 Edward Weston, <피망 No. 30 Pepper No. 3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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