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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푸름 Dec 06. 2020

불편한 아름다움은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

문혜인 <차별을 입다.> @ 빈칸 합정


 지난 2020년 11월 23일부터 11월 29일까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빈칸 합정’에서 문혜인 작가의 <차별을 입다.> 전시가 진행되었다.


 본 전시는 작가의 첫 전시이자 개인전으로, 네 벌의 옷과 그 옷을 착용한 모델의 사진들이 전시되었다. 목걸이나 티아라 및 작가 본인이 직접 제작한 악세사리 역시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 전시된 옷들은 드레스였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조금 다른 점이라면, 이 드레스들은 생물학적 남성의 신체 구조에 적합하게 디자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진 속의 모델 역시 생물학적 남성이다.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억압적 시선으로부터의 탈피인 ‘탈코르셋’ 운동이 보편화되면서, 불편함을 대가로 하는 아름다움인 드레스는 더이상 결혼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자신의 웨딩 복장으로 드레스를 선택하는 여성들은 많고, 이는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인식의 확립과 함께 여성에게는 ‘편안한 원피스’나 ‘정장’과 같은 새로운 선택지들이 생겨났다. 작가는 ‘이러한 저항을 사랑하고 공감한다'라고 하지만, ‘한켠으로는 의문도 남았다.’고 하며, 본 전시를 기획하게 된 계기를 소개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드레스는 코르셋으로 몸을 꽉 조이는, 입으면 숨을 쉬기가 힘들기도 한 불편한 의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함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사랑하여 착용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역시 있다. 작가는 그러한 ‘사람들’의 범위에 생물학적 남성을 포함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본 전시는 ‘극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름다움과 한 몸을 하고 싶어하는 생물학적 남성도 있지 않을까?’라는 작가의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는 특히 작가 본인이 웨딩드레스를 제작하는 일을 해왔기에 더욱 뜻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에 전시된 각각의 드레스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들은 ‘근혁’, ‘동훈’, ‘동환’, ‘동윤’이었다. 


 이 이름들은 흔히 ‘남성적인’ 이름으로 쓰이는 이름들인데, ‘중성적인’ 이름들을 사용하지 않고 위의 이름들을 사용함으로써 작가는 이번 전시의 드레스가 ‘중성적인 성향을 가진 남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생물학적 남성’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본 전시의 관점은 ‘젠더리스genderless’이다. 


 젠더리스의 시각에서 특정 생물학적 성별의 사회적인 특성 혹은 행위상의 특징을 따지는 것을 아주 무의미한 일이다. ‘여성다움’이나 '여성성'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상태로 태어났음’을, ‘남성다움’이나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상태로 태어났음’을 의미할 뿐 더이상의 의미는 없다. 


 젠더리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동성애도, 이성애도 없다. 한 생물학적 성별을 가진 사람이 다른 생물학적 성별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든, 같은 생물학적 성별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든, 그저 한 개인이 개인을 좋아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는 결코 이번 전시의 드레스가 성 소수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설파한다. 이번 전시의 드레스는 ‘생물학적 남성’을 위한 것이다. 그 ‘생물학적 남성’은 성 소수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특정 젠더다움’을 따지는 일은 정말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이 ‘불편한 아름다움’이 '강요'되는 범위를 넓히려 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작가의 의도는, 여성에게 선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남성의 선택의 폭도 넓어지는 것이 평등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택지가 있지만 선택하지 ‘않는’ 것과, 애초에 선택할 수 ‘없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작가는 생물학적 남성에게 ‘당신도 이 아름다움을 입을 수 있다.’라는 선택지를 준 것이지, 강요를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 역시 젠더리스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려 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에, 문혜인 작가의 <차별을 입다.> 전시 기획 소식이 들려왔을 때 정말 반가웠다. 이러한 새로운 실천적인 시도들은 아직은 마이너한 ‘젠더리스’라는 관점을 대중에 더욱 익숙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젠더다움’을 따지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시기가 빠른 시일 내에 오길 바라며 이번 오피니언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한다.


▼아트인사이트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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