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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푸름 Dec 17. 2020

너의 세계 속에 나는 죽었을까.

 네가 보고 싶어.


 그런데 아마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너는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너일 테니, 우리는 분명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테야. 내가 그리는 것은 너라기보다는 너와 떨어져 지내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던 그 한때일 테니 말이야. 우린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상상하기도 싫었던 그 상황은 현실이 되었으며, 사실은 견딜 만은 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잖아.


 너는 나와 아주 가까웠다가 멀어진 사람 중, 몇 안 되는 안 좋은 일이 없이 멀어졌던 사람이니까 말이야. 가장 가까웠던 우리를 흩뜨려버린 건 거리였고, 우리를 어색한 사이로 만들었던 건 시간이었으며, 우리를 더이상 연 없는 사이로 만들었던 건 성장이었잖아. 거리와 시간과 성장에는 죄가 될 것도 해가 될 것도 없지. 그러니까 나의 마음속의 너는, 나의 마음속의 너일 거라고,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 


https://www.youtube.com/watch?v=QfLNEdIYGq4

화나 - 시간의 돛단배(feat. 있다)
생각해 보면 낮에,
수년 만에 엄청나게 성장해버린
그와 뻔하게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며
난 계속 자꾸 뭔가 꽤나 먼 관계,
심지어는 동창생의 한 명으로밖엔 보이지 않아 조금 혼란했어.
머릿속이 복잡해.


 너를 생각하면 이 노래가 떠올라. 어느 날 거리에서 너와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게 돼.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을 거야. 확신 없이 '닮은 것 같은데...?' 생각하며 지나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누구 하나가, 혹은 서로가 상대를 알아본다고 해서 달라질 건 또 있을까?


 반갑기는 하겠다. 인사를 하고, 오랜만이라고 하겠지. 분명 너는 어딘가를 가는 중이었을 테고, 나도 할 일이 있었을 테야. 그럼 대화는 짧을 수밖에 없겠지. 나중에 밥 한번 먹자고 할까? 연락하겠다고 하려나?


 나 빈말 잘한다? 그런데 애정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그러지 못하겠어. 너를 보면 분명 열세 살의 내가 떠오를 테고, 그건 우정에 관한 한 그 어떠한 기억보다도 순수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말이야. 어릴 적 나에게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가까이 지냈던 너였고, 나는 분명히 변해버렸을 너를 볼 자신도 없고, 분명히 변한 것일 나를 네게 당당히 소개할 자신도 없어.


 너와 밥 한 끼를 한다고? 이제는 술이 섞일 수도 있을 우리는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사람에게 환상을 갖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왔으며 익히 알고 있어. 그런데 지금 너에게만큼은 환상을 가지겠다고 고집하는 거야.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 준다고 하잖아. 내 생각에 시간은 그냥 모든 걸 뭉뚱그리는 거야. 내가 과도하게 감정적인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게 된다면 너는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그런데 그만큼 나는 너와 다시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


멀어져간 몇몇 관계를 솎아내는 건 무정한 게 아냐. 괜찮아 


에곤 쉴레 -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나의 세계 속의 너는 죽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너의 세계 속의 나는 이미 죽은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해.




화나 - 시간의 돛단배(feat. 있다)

에곤 쉴레(Egon Schiele1890~1918) -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목판에 유화,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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