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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Nov 28. 2023

전쟁 같은 맛

잊혀진 작가가 되기 싫어서 쓴 글


작가 그레이스 M 조의 엄마는 흔히 말하는 기지촌 성매매 여성(양공주) 이었다. 미국인 선원을 만나 결혼 후 남편의 고향인 워싱턴주 셔헤일리스에 정착한다.  지독한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남편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 시절은 언어, 문화적 배경, 기억과 음식 등 생활의 사소한 부분들에 의해 정체성이 정치화 되었던 냉전 시기였고 외국인 혐오가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레이스 조의 엄마는 남매를 보란 듯이 키웠지만 고생이 너무 심했던 탓인지 40대에 (그레이스가 열다섯 살 때) 조현병 환자가 되었다. 그레이스에게 엄마는 이해가 되는 사람이면서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기도 했다.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엄마가 부끄러웠던 적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존재와 생애가 그레이스 자신의 학문적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책으로 2021년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분 최종 후보작에 올랐고 2022년 아시아 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수상했다. 만약에 어떤 작가가 이 책의 내용으로 한국에서 책을 낸다면 소설로 장르를 바꿔서 나왔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다행한 불행을 읽고 많은 독자들이 격려를 해주었다. 그동안 살아내느라 고생했다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서울 대전 대구 광주 부산 포항 멀리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아낌없이 응원을 해주었다. 따뜻한 말로도 모자라 카페라테를 실컷 마시라며 돈을 보내주시려는 분도 여러 명 있었다.  치부라고 할 수 있는 가정사를 드러내는 용기를 낸 것에 대해서도 엄지를 들어 주셨는데, 나는 그 점이 적지 않게 의아했다.  거짓말 조금도 안 하고 나는 내 인생을 치부라고 여긴 적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쥐구멍에 볕이 들듯 환해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렇다고 치부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솔직히 한 때는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다.(이렇게 말하면 자화자찬이 되지만) 오히려 나의 애씀이 약간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일부를 치부라고 여기며 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서글프면서 나로서는 생소한 개념이라서 그걸 받아들이려면 아침에 먹었던 그릭 요거트를 다시 게워내야 할 것처럼 거북하다.


지난 여름부터 두 어달 전국을 돌면서 독자를 만났다. 그러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 어느 정도 짐작했던 사실이었지만 뇌리에 깊게 박아두고 앞으로 책을 쓸 때는 꼭 참고해야지 하고 다짐 아닌 다짐을 한 것이 있다. 그게 뭐냐면, 사람들은 현실감이 1도 없어도 괜찮고 개연성이 턱없이 부족하고 앞뒤가 단 하나도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스토리라고 해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냥 꿈을 꾸게 하는 이야기를 원한다. 그것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에 백마 탄 왕자를 만나 행복을 찾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기대하는 철없는 소녀들의 마음과 같다. 독자들은 bts의 정국과 같은 외모, 그와 같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를 내 옆자리의 남자와 바꿔치기하는 상상에 빠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도 저도 아닌 현실에 허우적대는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면 강력한 이야기, 때론 환상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 개인의 불행을 지리멸렬하게 늘어놓은 책이 매력적일 리가 없다. 내가 이 사람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작가는 자신의 tmi를 왜 이렇게 사방팔방에 나팔을 부는 거지? 와 같은 후기를 듣기 십상인 것이다. 책에 대한 나의 이런 종류의 푸념은 내년에 나올 책에도 아래와 같이 썼다.





해외에서 베스트셀러인 책을 가져오지만, 한국의 독자에게는 전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종류의 책이 있다. 개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담은 책들이다. 나는 남편과 사별한 후 이렇게 애도 기간을 보냈다. 나는 결혼을 이렇게 끝냈다. 등등 그런 종류의 스토리텔링이 우리 독서 시장에서는 크게 반응을 얻지 못한다. 나는 그 이유를 자기 고통은 물론 타인의 고통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는 건 물론이고 위로하는 것조차 힘들어한다는 걸 독서 모임을 하며 알게 됐다. 이를테면 독서 모임의 구성원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고 그 사람이 일어설 의욕조차 없다고 할 때 사람들은 초조해한다. 기댈 어깨를 빌려준다는 데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왜 빨리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얼마 안 가 친절했던 사람들은 언짢아진다. 그러면서 위로를 시작할 때와는 반대의 생각을 한다. 애초에 그런 식이니까 쓰러지는 거야 민폐니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쓰러져. 처음엔 동정했던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뿌듯함을 맛보게 해주지 않는다는 점 때문인지, 침울한 사람을 대하기 불편해서인지, 남의 절망이 자신에게도 올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이고 부담을 느끼는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부담이 길어지면 점점 성가셔져서 결국 화가 나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무엇보다 누군가가 옆에서 침울해하고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어두워져서 불쾌해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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