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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Nov 24. 2022

오, 남편! 오,윌리엄!

약간 다른 시선 3


남편의 참견 중 가장 어이없고 홀라당 깨는 건 바람의 방향을 알려주면서 빨래 건조대의 위치를 정해주거나 분갈이 흙에 관해 설파를 하며 (식물학 박사라도 되는 양) 아는 척을 할 때. 심지어 이태리 음식의 엉터리 조리법을 알려줄 때도 있다.(파스타도 한 번 만든 적 없는 위인).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 남편이 알고 있는 것보다 정확한데도 자신이 맞는다는 것에 확신이 차 있는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안 되겠다 싶어 틀렸다는 걸 알려주면 끝까지 맞는다고 우긴다. 그의 그런 성격에 질리지만 대부분은 참고 들어준다. 안 그러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싸움이 나기 때문에. 나도 사람이다 보니 못 견디게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정말 어렵게 싫다는 말을 꺼내는데 그러면 십중팔구 토라진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이 삼일 정도. 잘 되라고 가르쳐 준 자신의 의도를 내가 몰라주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 같다.

남편의 잔소리가 지겨워 못 살겠다고, 틀린 걸 맞다고 우기는 점이나 잘못된 상식을 알려주는 것도 지긋지긋하다고 지인들에게 하소연하면 귀엽게 봐주라며 집안일에 무관심한 것보다 낫지 않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조금 어리둥절했다. 남편을 귀엽게 봐준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여운 건 아니지만 귀엽게 여기라는 뜻인가? 귀여운 행동을 한다고 계속해서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 귀여워진다는 뜻인가? 생각해 보니 나라는 사람은 귀엽지 않은 대상을 귀엽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속에 없는 말을 쉽게 하는 위인도 못 되고 근거 없는 칭찬을 하려면 혀가 꼬여서 내 혀를 씹는 사람이다. 말버릇이 뻣뻣하기 짝이 없는 내가 귀엽지도 않은 남편을 억지로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의 행동을 그냥 눈 감아 주라니. 순간 욱하는 마음이 돼서는 생각했다. '귀엽게 봐주긴! 우리 집에서 귀여운 건 고양이 하나로 족해!




이랬던 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못된 심성이 어느 날 갑자기 착해질 리는 없는 일이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결도 달라진 것 같은데 그 변화가 워낙 미미해서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걸 우기는 남편은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고구마를 삶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며 자기가 알려준 대로 삶으라고 강요한다. 그대로 하지 않으면 토라지는 것도 여전하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백 프로 맛이 없다. 실패했다는 걸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실패를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것도 그대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런 그가 예전만큼 지긋지긋하지 않다. 26년 동안 비슷한 상황을 겪다 보니 내 쪽에서 포기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다. 노년으로 접어드는 부부가 흔히 하는 말처럼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서 서로를 측은히 여기는 것도 아니다.




요즘 나는 그를 보면서 나를 보고 나를 생각하면서 그를 발견한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부부 일심동체? 그건 더욱 아니다. 어쨌거나 내 입장에서는 이 변화가 좀 당황스러운데, 그의 부족함과 단점을 보는 것과 동시에 나의 모자람도 반드시 오버랩이 되어 영상으로 보인다. 지금은 남편의 잔소리를 들으면 신기하게 내가 했던 잔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내 귀에 꽂힌다. 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난동을 피웠던 어느 날의 내 모습이 문득 눈앞에 나타나거나 그의 개똥철학을 듣고 있으면 평생 내가 한 헛소리가 불현듯 떠올라 귓불이 붉어지는 식이다. 이제는 그를 예전처럼 흉볼 수 없어졌다. 남편의 뒷담화는 여전히 재미있지만 어쩐지 그전만큼 신나지는 않아서 어리둥절하다. 한동안은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어가는지, 어디서든 튀는 사람이었던 내가 고유의 색을 잃고 점점 회색 인간이 되어가는지 의아했었다. 오윌리엄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변화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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