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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Nov 11. 2022

약간 다른 시선2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며칠 전 동거인(남편)이 아팠다.  27년을 함께 살면서 그 사람이 앓아누운 걸 본 게 딱  세 번이다. 한 번은 고등어를 먹고 온몸에 알레르기가 생겼던 날이었고 또 한 번은 심한 감기 몸살이었고 마지막은 사랑니 충치 때문이었던 걸 보면 자기가 평소에 큰소리 뻥뻥 치는 대로 건강 체질인 건 확실했다. 겉으로 표시를 안 냈을 뿐 아팠던 적이 있었을 텐데 웬만큼 아프지 않고는 아프다는 말을 안 해서 모르고 지나간 적이 더 많을 것이다. 생전 아프다는 말을 안 하는 그 사람도 피할 수 없이 노화가 왔다. 잇몸에 염증이 생겨서 밤새 끙끙 앓는 모습으로 보니까 별스럽게도 마음이 안 좋았다. 노상 여기저기가 아픈 나는 내 몸에 신경 쓰느라 동거인(남편)의 건강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이번엔 이상하게  마음이 뜨끔하면서 미안함이 슬슬 올라왔다.  처음에는 잠을 설치고  나중에는 잇몸이 아픈 것이 꼭 나 때문이라는 듯 날 원망했고 병원을 가라는 말에 짜증을 냈다. 평소 같으면 저 인간이 또 왜 저러나 했을 텐데 이번엔 마음이 진짜 좀 야릇했다. 그의 노화를 확실히 실감했다고나 할까. 조금 비약이긴 하지만 죽음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동거인(남편)의 건강을 챙기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듯 평생 집 밖을 떠돌던 아버지의 안위를 챙기는 것도 나의  관심 밖이었다. 처음부터 자식 된 도리를 모르는 후레자식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고 아버지의 자리를 비워두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꿈에서는 수와 우로 장식된 성적표를 아버지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마누라와 자식의 존재를 잊으려 했던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했다. 엄마의 고생을 지켜보면서 결심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면 절대 받아주지 않으리라. 매몰차게 대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나는 정말로 그때의 다짐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며 눈물  방울 흘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창백한 어버지의 얼굴을 만지려던 떨리는 손을  의지로 막았다. 그러나  모진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완전히 무너져 버렸으니까. 그렇게 아버지와 이별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은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같다.  아무리 이해하려도 이해할  없던 존재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죽음이다. 아버지가 집을 나갈 수밖에 없던 이유, 가족들에게 돌아올  없던 이유, 죽음마저도 자식들에게 숨기려던 이유.  살아생전에는 이해할  없고 이해할 마음 조자 들지 않던 아버지의 개인 사정을 아버지의 죽음 뒤에 이해하게 됐다. 그러고 나니까 정말로 눈물이 말라버렸다. 죽음이라는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죽기까지 우리가 살아내야  삶이  슬펐다. 나는 남아있는  앞에서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정말 무덤이 필요 없어? 두말하면 잔소리! 땅덩어리나 아니나 쥐꼬리만 한 나라서 죽는 놈들 다 매장했다가는 땅이 남아나들 안 헐 것이다. 우리 죽으면 싹 꼬실러부러라. 꼬실라서 니 편한 대로 암디나 뿌레부레라. 고기밥이 되든둥 거름이 되든둥

기왕지사 죽은 몸 뭣이라도 도움이 돼야제.

-아버지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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