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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un 04. 2024

동인천 여행의 여운



세상과 사람의 선의를 신뢰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어리석게도 그게 힘든 세상 살이를 하면서 꼭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했고 약아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 시절의 짧은 소견으로는 괜찮은 사람이나 심신이 안정된 어른이 되는 길은 딱 하나의 길뿐이라 생각했고 다른 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그 길에 들어선 사람의 등 뒤에 서서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그들과 나의 차이점은 두드러졌다.  그 사람들은 욕망을 잘 다루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보인 가장 큰 이유는 여유로운 생활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그게 참 멋있게 보였고 부러웠다.
욕망을 잘 다룬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당시의 나는 그저 살아내는 데 급급했고 생존이 모든 일의 최우선이 되었다.  그럴 때 하는 나의 선택이란 대단히 무겁고 진지하고 엄중하기까지 했는데 그렇게 신중하게 한 선택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늘 좀 어이없고 구렸다.

사회생활을 하며  가장 놀란 건 사람이 사람에게 호의를 가질 의무가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저 잘 보이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데 그런 내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에 들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애매한 수준의 재능이 상사나 동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주 침울했다.  인정받기 위해 배려를 선택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배려도 지나치면 무리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나치게 굽신거리는 듯 보이면 무능력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길어지면서부터 그들의 재능과 행운과 친화력을 질투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이 많다고 여기면서 중심에서 멀어지고 일정한 거리로 물러나야 마음이 편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 내게 주어진 일을 잘해내고 싶다는 욕망이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주변인으로 지내면 패배자가 되는 걸 잠시나마 미룰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들의 주변을 배회하며 살았다

사는 게 너무 어렵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거만한 척 한 적도 있다. 거만하면 욕을 먹을 것 같은 분위기에서는 모든 걸 초탈한 척했다. 그렇게 나룰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방법을 익혔음에도 뻔한 실력이 탄로 날까 봐 겁이 났고 밤이면 악몽에 시달렸다.
누군가가 내가 만든 결과물에 오류를 찾아내는 게 무서워서 아직 완성도 안 되거나 이제 막 시작한 일에도 오류를 찾아낸다고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치면 아예 손을 놓아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 시절 동네마다 흔하게 있던 비디오 대여점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는지 살피느라 남의 가게 앞을 서성였다.  





암울한 그때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만 좌충우돌 살아내면서 어렴풋하게 배운 것이 있다. 조금 어이없고 단순한 방법이지만 내게는 효과가 있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의 기준을 약간 낮게 잡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낙천적인 사람이 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기를 쓰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고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는다는 걸 경험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데 나름 재능도 있었다. 남들처럼 매끄럽게 살지 못하는 대신 나에게 주어진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유연함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고 생각이지만 이런 변화는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준 선물이다. 이유를 모르는 막막함 같은 게 찾아오면 그냥 그 감정에 푹 빠졌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렀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았고 아까워하지도 않았다. 무심히 보낸 시간은 갈망하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주었다. 시간의 흐름을 적당히 망각하니 자유와 느긋함이 왔다. 그제야 숨도 쉬어지고 살만해졌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나 걱정에 사로잡히면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생각에 빠지는 순간부터 오늘과 내일을 잃게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현실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나이가 많고 그만큼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내 관심을 오늘에게 전부 주고 싶다.





여행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상념에 젖어들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한다. 어디를 가는가 만큼이나 누구와 하는가도 중요하다.  반나절의 동인천 여행 친구는 한 수희 작가님이었다.  함께 라테를 두 잔이나 먹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마시고 맛있는 스키야키도 얻어먹었다. 희희낙락 웃고 떠들며 낡고 오래된 도시를 배회했다. 피곤해서 잠이 올 법도 한데 이상하게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어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건 평소의 생각과는 좀 달랐다. 엉뚱하게도 누구에게나 호의를 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동인천 골목을 누비며 흘린 땀의 양만큼, 체온만큼이나 뜨거운 열의였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열정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여행의 참맛인가. 내가 나 아닌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것. 동인천 여행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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