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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Feb 25. 2022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의 중간 어디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수희님


나는 지금 고통 속에 있습니다. 허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삼십 분 동안 앉았다 일어났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긁적이다가 울어버릴까 하다가 그건 좀 아니다 싶어서 참고 있는 중인데 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몇 자라도 쓰자 싶어서 일단 이 글을 씁니다. 무슨 일이냐고요? 글쎄 오늘따라 말이죠. 쓰겠다는 열정이 넘쳐가지고 그리고 유달리 신이 나더라고요, 거의 다 쓴 편지가 허공으로 뿔뿔이 흩어졌어요. 어차피 확인이 안 돼서 하는 말이지만 꽤 잘 쓴 편지였어요. 거의 다 썼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매번 한글 프로그램으로 쓰던 편지를 오늘은 어째서 브런치에 바로 써버렸을까요? 브런치는 어째서 내가 쓴 편지를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집어삼키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얀 얼굴을 뻔뻔하게 내밀고 있을까요? 내 편지를 왜 튕겨 버렸을까? 브런치야 내 글 내놔라. 제발 내 편지를 반송해다오.


아무튼 멘붕 상태에서 다시 편지를 씁니다. 그래서 편지는 상당히 짧을 예정이에요.  편지에 대한 열정은 이틀에 걸쳐 쓰면서 거의 다 불태우고 재만 남았거든요. 지금은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솟아오른 어깨에서 통증이 시작되었어요. 그래서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쓰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자랑 타임을 가져봅니다. 수희님 지금 내 방은 천리향 꽃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어요. 계절이 두 번 바뀔 쯤엔 어쩌면 우린 마스크를 하지 않은 얼굴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끝이 오긴 오려나 봅니다. 참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어요.






코로나가 끝나길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한 정도로 지루한 소설이 아마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일지도 몰라요. 조금 억지스럽지만 나는 소설에도 성격이 있다고 믿어요. 소설을 앉혀 놓고 mbti 검사를 하면 크게 두 종류의 유형이 나올 것 같아요. 외향형의 ENTP(풍부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함)와 내향형의 INFJ(사람에 관한 뛰어난 통찰력). 외향적 소설은 외부 세계로 확장하는 소설이에요.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나 삼국지 같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세계관과 역사관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줄거리도 확실해서 소위 잘 읽히는 재밌는 소설. 반면에 내향적 소설은 말 그대로 내면으로만 삽질을 하는 소설이에요 노벨상뿐 아니라 해외에서 무슨 문학상을 탄 작가가 쓴 소설은 대부분 내향적인 것 같아요. 인과 관계와 전후 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경험과 상상의 경계도 모호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 책을 읽을 때면 같은 문장은 읽고 또 읽다가 잠이 드는 경험을 하게 되죠. 다음 날 다시 어제의 페이지로 시작하지만 한 장도 넘어가기 힘들죠. 그렇게 며칠을 같은 페이지에 머물다 깨닫는 거예요. 역시 난 노벨상 하고는 안 맞아. 하고요.

사실 얼마 전 인터넷 서점 서평 코너에서 이 책에 관한 독자의 평을 읽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서평은 "지겹다. 자비없는 책! 이었어요.

지금은 책을 읽지 않고 서평을 쓰는 시대이자 별 한 개로 책에 관한 불만을 표현하는 시대인 것 같아요. 나는 두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고 가끔 잘 쓴다는 것과 잘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요. 자기 돈을 내고 책을 사 읽는 독자들은 책에 관한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고 어쩌면 책의 운명이 그들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 독자들을 만나면서 생명을 얻어요. 그래서 나는 잘 쓰는 것만큼이나 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페터 한트케



내향적인 소설을 읽을 때면 긴 시간을 들입니다. 이해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어느 정도는 지루하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요. 단단한 문장을 읽으면서 그 문장이 한순간에 물러지길 바라지 않아요.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읽는 책도 좋지만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읽는 책의 유용함과 즐거움도 놓치기 싫거든요. 최대한의 독자를 확보해야 하는 치열함 속에서도 끝까지 자기중심을 놓지 않는 저자를 믿어주고 싶어요.

그런 마음으로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를 읽었고 지금도 들뢰즈를 읽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만만한 작가들이 아니라서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답니다. 뒷골이 땡기기도 해요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아요. 오히려 대단히 매력적이에요. 남편을 떠나면서 남긴 아내의 짧은 편지부터 저를 완전히 매혹시켰어요.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남편은 떠난 아내를 찾아 미국으로 가지만 아내를 찾을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호텔 바에 가서 하릴없이 맥주를 마시면서 사람 구경을 하거나 벨보이에게 팁을 주고 매일 빈둥빈둥거리면서 뭐가 피곤한지 수시로 낮잠을 자거나 낯선 골목길을 배회하다가 어린애들에게 삥을 뜯기고,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악몽을 꾸고 툭하면 혼잣말을 해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남자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문장으로 옮겼으니 이상하게 읽힐 수도 있어요. , 이상하지만 페터 한트케를 믿어 봅니다. 저자는 분명히 내가 알아야  것이나 알고 싶어  무언가를 알려줄 거라고 믿어보는 거예요. 남이 보면 교양 있는 척한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저자의 문장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런 끝내주는 문장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자가 아내를 생각하며 혼잣말을 하는 대목인데요. 인물을 관찰하는 작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빛나는 문장이에요.


아무튼 그녀는 노상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곤 했어. 사뿐사뿐 걷는 발걸음은 제법 우아하긴 했지만 늘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듯하는 것이 문제였어. 껑충 걸음으로 춤추듯 가볍게 나아가지만 이내 넘어지고 말았지. 그러고 나서는 다시 껑충껑충 몇 걸음 더 걸어가 보지만 마주 오던 누군가와 부딪히곤 했지. 그런가 하면 나중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뜨개질 용구에 찔린 적도 여러 차례였어. 뜨개질 작업을 완성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번번이 실을 다시 죄다 풀어내야 했지만, 뜨개질 용구는 늘 가지고 다녔던 그녀였지. 그래도 집안일은 잘하는 편이었어.

그녀는 못을 하나 박더라도 결코 구부러뜨리는 법이 없었고 양탄자를 깔고 벽지를 바르는 일에도 능숙했지. 옷 수선은 물론이고 의자를 조립하는 일이라든지 자동차의 찌그러진 부분을 두드려 펴내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어. 하지만 문제는 미끄러져 넘어진다든가 비트적거리길 잘해서 애꿎은 다른 물건들을 짓밟아 망쳐놓는다는 것이었지.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였어. 그 제스처는 또 어떻고! 한 번은 그녀가 방으로 들어와서는 전축을 끄려고 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문간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는 전축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만 까딱하는 것이 아니겠어. 또 한 번은 초인종이 울릴 때였어. 그녀가 나보다 먼저 문쪽으로 다가갔는데, 매트 위에 놓인 편지 한 통을 본 거야. 그녀는 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가 내가 들어가려고 하니까 나보고 편지를 집어 들라는 뜻으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지. 물론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바람에 손을 헛디뎠어. 나는 그녀의 뺨을 갈겼지. 하지만 다행히도 어설프게 휘두른 탓에 빗맞았고 우리는 곧 다시 화해했어.








이 문장 또한 사람들이 꼼꼼하게 읽었으면 하는 문장이에요. 나는 여기에서 한트케에게 반했거든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나는 자연이 우리를 어떤 것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연은 나를 압박하는 존재였고 적어도 어딘가 모르게 나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곡식을 벤 뒤 그루터기만 남아있는 논두렁, 과일나무들, 그리고 목초지 등은 내게 불쾌감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공포심을 유발하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해왔다. 이를테면 맨발로 논두렁을 내달려도 보았고, 나무를 기어오르다 나무껍질에 피부를 찢긴 적도 있었으며, 비 오는 날 오줌을 갈겨대는 암소들 꽁무니를 쫓아 고무장화를 신고 목초지를 걸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에서 비로소 드는 생각이지만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자연 속에서 한 번도 자유롭게 활동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령 과일나무는 다른 누군가의 소유였기 때문에 주인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들판을 가로질러 꽁지가 빠져라 줄달음을 쳐야 했으며, 가축을 돌보는 대가로 얻는 것이래야 그 가축을 보살피는 데 필요할 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무장화 한 켤레가 고작이었다.






주인공은 아내를 찾으려고 미국에 간 게 아니라 한 여자와 부부로 사는 동안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중입니다. 과거와 완벽히 이별하지 않고는 다음 생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각자가 하는 이별 여행. 그건 그들이 밟아야 하는 수순같은 거고 마침내 여행이 끝나면 잃었던 자아를 찾게 될 거라는 걸 소설의 끝에 가서야 알게 돼요. 그 앎이 너무나 느리게 옵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서둘지 않으니까요. 애당초 작가는 즉각적으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요. 나는 때때로 바랍니다. 책 앞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기를. 책 앞에서 겸손하기를요. 이제 막 한글을 깨치고 더듬거리며 책을 읽는 어린아이 같이 눈을 반짝이고 싶어요. 나는 많은 것을 모르지만 모른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요.알려고 하지 않게 될까봐 걱정이죠. 하지만 오늘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지금 읽지 않으면 영원히 읽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아요. 어릴 때 놓쳤던 책은 어른이 되면 읽기 힘든 것 처럼요. 나는 한수산의 책을 읽으며 연애를 꿈꿨지만 그러느라 황석영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는데 지금도 찾아 읽지 않아요. 지금 다른 걸 읽느라 놓치는 책도 나이가 더 들면 읽기 힘들겠죠. 그건 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읽다 보니 수희님과 편지를 주고받는 행운이 찾아오잖아요? 그렇다고 어렵고 지루한 책이 제 취향은 아닙니다. 좁디좁은 나의 책 취향을 넘어서려는 노력이라고나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책에게 조금 다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좋아해 주고 그래서 많이 사고 많이 쟁여두고 오래 봐주고 남들이  아는 작가도 좋지만 남들이 모르는 작가도 알아봐주며 골고루 다양하게, 그렇게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편지 교환은  좋네요.



2022. 2. 25


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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