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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ul 07. 2022

초조한 마음의 실체

초조한 마음/슈테판 츠바이크


연민: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



수희 님 안녕하세요.

요즘은 재밌을 법한 일을 함께 계획한다는 이유로 작가 님과 자주 연락을 하는데 지면을 통해  새삼스럽게  안부를 물으려니 약간 어색하네요. 오늘은 컨디션이 영 시원하지 않아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젯밤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한참을 걸었거든요. 입고 있던 원피스가 온몸에 달라붙었고 카카오 택시도 잡히지 않았어요. 버스 정류장엔 지붕도 있었는데 무서운 기세로 내리는 비엔 별 소용이 없었고요. 아무튼 그 비를 다 맞고 집에 도착하니 그제야 마중 나와 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서럽더군요. 그래 어차피 혼자야. 각자도생. 인생이 그런 거지 뭐.



오늘은 바람이 조금 불어주네요. 눅진한 바람에 얼굴을 가만히 내어 주면 물방울이 가득 달라붙는 것 같아요. 날씨 탓인지 저는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와요. 잔뜩 흘린 땀을 미지근한 물에 씻어내고 에어컨 앞에 앉으면 몹시 나른해져서 하루 일과를 이쯤에서 끝내 버릴까? 싶어 져요. 작은 스탠드 줄을 당겨 노란 불을 켜고 미숫가루를 한 잔 타 와 오도독오도독 얼음도 깨 먹으며 바싹 마른 인견 이불 위에 엎드립니다. 그리고는 단잠이 들 때까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를 읽고 싶어지는 바야흐로 게으름이 허락되는 계절이네요. 그렇게 느긋한 기분이 들 때면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게 돼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택배 기사 님들이 신경 쓰이고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시원함을 느끼지 못하는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은 직장인들의 눈치도 보입니다. 누구도 나의 게으름을 흉보거나 백수 생활을 나무라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미안하달까. 이렇게 놀아도 되나, 숨어서 조용히 빈둥거려야 하나.



남들은 그러데요? 그런 것까지 남의 눈치를 보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요. 글쎄요. 나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짐작해 본 이유가 있긴 해요. 하는 일 없이 이렇게 놀고 있는 지금의 생활이 스스로 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의 생활이 좋으니까. 이렇게 빈둥거리며 사는 게 너무나 좋으니까, 게으름을 피워도 되는 이 생활을 남들도 부러워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봐요.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즐기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반백수로 살아가는 내가 미안해지는 건 좀 웃기죠. 부러워 하기는커녕 저 사람 저렇게 놀기만 해서 어쩌나.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정작 사람들은 권태로운 나의 일상에 아무 관심이 없는데, 혼자서 이상한 부채의식에 사로잡힌 걸 자각하는 순간 혼잣말을 해요.




김설! 너는 너무 쉽게 동정하고 함부로 미안해하는구나.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든 거니?





수희 님! 남에게 연민을 잘 느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일까요?(아, 내가 착하다는 말은 아니고요.) 그 명제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으니 참 오래 전의 이야기네요. J는 그때 만나 우연히 친해진 친구예요. 좋은 애였죠. 쉽게 눈시울을 붉히고 같은 반 친구들을 향해 불쌍하다는 말을 자주 하던 아이. J의 흔하디 흔한 연민에 자주 감동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사람을 두고도 연민의 감정이 들지 않는 내가 실망스러웠어요. 어릴 때는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불쌍하다. 안됐다.라는 말, 그게 쉬운 방식으로 타인의 상황을 판단한 결과라는 걸 몰랐었죠. 연민이라는 감정은 꽤나 일방적이에요. 당사자는 연민의 대상이 되는 걸 원치 않는데 연민을 느끼고 달려드는 자들을 막을 도리가 없어요, 가난이 싫어서 가출을 한 친구, 학교 선배와 사귀다가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한 친구, 습관처럼 본드를 마시는 날라리 친구. 배가 고프다면서 얼굴을 볼 때마다 500원을 빌려 달라던 친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별의별 친구들이 모두 J를 찾았어요. 500원을 빌려줄 수 없었던 J는 돈 대신 시간을 내어 주었어요.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했어요.


"참 좋은 아이구나.세상에 저렇게 착한 애가 있다니,그게 내 친구라니." 한동안 뿌듯했지요. 그러면서 나도 J처럼 착한 사람이 되어보자 했어요.

J는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엔 어김없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어요. 그때마다 J가 한 말은 비슷했어요.오늘은 어떤 친구가 자신을 찾아왔고 불쌍해서 미치겠다고,그 불쌍한 친구를 어떻게 위로했는지 자랑처럼 구구절절 늘어놓다가 마지막엔 "지겹다" "지겨워 죽겠다"

 "왜 자꾸 나를 찾아오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어요. J의 변덕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그토록 복잡하다는 사실. 그걸 알고 감탄했고 J의 연민이 가짜일까 봐 내심 두렵기도 했어요.


J와 친구가 된 지 40년, 그 긴 세월 동안 나도 J에게 불쌍한 년이 되었던 적이 있어요.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 J는 불쌍하지 않은 사람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니까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불쌍한 년, 지지리 복도 없는 년  이라면서 울었어요. 연민이라는 놈은 마음에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면 좀처럼 가라앉히기 힘이 드는 모양이더라고요. 무슨 행동이라도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게 되는 것 같아요. J는 나에게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인식시키고 싶어 했어요. J는 남을 동정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에 들어했고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식에 취해 점점 이상하게 변했어요. 연민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면서 대상자를 찾기에 바빴고 연민이라는 감정 때문에 인생이 망했다고 말히면서도 사람들을 향해 툭하면 쯧쯧쯧쯧 혀를 찼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J의 도움이 절실한 다급한 일이 생겼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J에게만큼은 말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J는 켰던 전기 스위치를 재빠르게 꺼버렸어요. 그때 어둠 속에 서서 생각했어요. 진정한 관심은 마음대로 켜고 끌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J는 그동안 나에게 뭘 원한 것일까. 어리둥절한 상태로 시간은 흘러갔어요

수희 님. 그쯤 J는 깨닫게 되었겠죠? 연민에 사로잡히는 일이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는 걸요. 지나친 연민 때문에 남의 운명에 관여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도 알았을 거예요. 아니면 어디까지 함께 갈 건지 미리 생각하고 지금 손절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던가. 당시엔 조금 서운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현명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예전처럼 J와 자주 연락을 하지 않지만 가끔 소식을 듣곤 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경계하며 지낸다고 해요.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요. 무엇보다 자신이 남을 오래 참아줄 만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함부로 동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바로로 만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남의 불행을 보면 눈물짓는 과거의 J보다 냉정해진 현재의 J에게 나는 더 마음이 가요. 이상한 자의식이 발동할 때마다 생각해요. 남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하지 말자. 그 의미를 쓸데없이 숙고하고 곱씹으며 야단법석을 떨지 말자. 똑똑한 척, 착한 척하지 말고 나나 잘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쾌활하게 살자.




수희 님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은 때때로 주제 파악을 못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려고 들썩거릴 때마다 조용히 꺼내 읽는 책이에요. 아래의 구절을 읽으며 나부대는 내 마음을 가라앉힌 답니다.


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P17



2022.7.7

16일을 기대하고 또 두려워하는 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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