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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Jul 14. 2022

최재천씨의 재능

최재천, 안희경 <최재천의 공부>



설님.


저는 지난 주에 대전에 가서 충남대학교 학생 몇 명과 독서 모임 같은 것을 하고 왔습니다.(이로써 공식적인 행사는 마무리되… 아니, 8월부터 다시 시작이네?) 이 학교의 여학생 다섯 명이서 책을 좀 읽어보자, 하고 독서 동아리라는 것을 만들었다는데요, 그 동아리에서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 저를 불러준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신기한 행사에는 무조건 갑니다.(땅끝마을이라도 갈 거예요.) 저 같은 아주머니를 푸릇푸릇한 대학생들이 초청해준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잖아요. 그날 더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요, 바로 이 동아리 회장 학생의 부모님을 만난 것입니다. 실은 부모님이 제 책을 좋아하셔서 딸에게 권해 주셨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부모님은 제 생각보다 너무 젊으셨고, 생각해보니 아, 대학생의 부모님이라면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게 당연하구나 싶었고, 부모와 딸이 함께 읽는 책의 저자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더라고요. 물론 좋다거나 영광스럽다거나 기쁘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신기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아무튼 그날은 저에게 대학생 독자들을 만나는 즐거운 자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고교생 딸을 둔 엄마로서 자, 현 시대의 대학생이란 어떤 존재들인가? 라는 궁금증을 풀고 싶은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금 놀랐습니다. 제가 참여해본 어느 독서모임보다 활기차고 열띤 분위기였고요, 저의 대학생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이 깊고 진중한 모습들에도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이들이 그 MZ세대라는 말을 자조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었고요, 대체 왜 자기들한테 그런 별칭이 붙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렇지요. 그들이 나서서 "나는 MZ세대야!" 하고 외친 것이 아닙니다. 아랫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윗 세대들과 마케터들이 붙여놓은 이름일 뿐이지요. 우리의 X세대처럼 말이에요.(하긴, 저는 X세대도 못되는 N세대였습니다.)


아무튼 그날 저희가 함께 읽은 책은 일전에도 소개한 엄기호의 <공부 공부>라는 책이었어요.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저는 해결책에 많이 밑줄을 그은 반면에, 이 학생들은 문제점과 그 원인에 밑줄을 많이 그었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이 친구들은 지금 문제의 한가운데에 있거나, 이제 겨우 그 문제에서 한 발 떨어져 나와 볼 수 있게 된 것이로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 친구들이 책 속에서 유독 공감했던 부분은 저에게도 따끔했던 부분이었는데요, 고학력 전문직 부모를 둔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학생들의 부모님들도 대개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공부 공부” 하고 다그치지도 않아요. 꼭 공부만이 길이 아니니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행복하게 살아도 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럼에도 이 아이들은 공부 컴플렉스에 시달립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에 쫓기거나, 해도 안 나오는 성적 때문에 괴로워 하지요. 그리고 자신은 부모처럼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더 불안해 합니다. 제가 만난 대학생들은 이게 꼭 자기 이야기가 같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저는 반대로 내 아이가 이런 아이가 아닐까, 하고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대개 대학 졸업자가 아니었습니다. 제 부모님만 해도 아빠는 중학교만 겨우 졸업, 직업군인이 되고 나서야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딸 수 있었어요. 엄마는 고등학교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중퇴를 해야 했지요. 그러니까 정규 교육은 두 분 다 중졸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부모보다 못한 학력에 대한 컴플렉스가 없었습니다.


저는 심지어 저희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 시내의 4년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었어요.(아마 마지막이었던 듯도 합니다.) 친척들 중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30평형대 이상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고급 승용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무직 화이트칼라 노동자조차 없었어요. 군인이거나, 배를 타고 고기를 잡거나, 공사장 기술자로 일하는 정도였지요. 그리고 제 아이들은 우리 가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와 학력이 같거나 어쩌면 그보다 못하게 될 겁니다.(공부를 저렇게 싫어하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것은 전대미문의 상황이다. 우리 집안의 어느 누구도 이러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어떤 지혜를 가지고 풀어야 하나? 우리 집안에는 그런 지혜 따위는 없다. 그런데 미래의 문제를 과거의 방식으로 풀어도 되는 것인가? 미래의 문제는 미래의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느 누구도 접해본 적이 없고, 어느 누구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미래의 방식. 그럼 나는 그것을 어디에서 얻어야 하는 거지?


그런 마음으로 저는 마침 밀리의 서재에 뜬 <최재천의 공부>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저는 최재천이라는 학자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호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재미있고 마음이 열려 있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학자라는 이미지 말이에요.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제 안의 이미지는 와장창 깨져버립니다.


미래 세대를 위한 공부라는 주제의 이 이야기는 대부분... 자기 자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솔직히 말할게요. 내가 뭘 했는데 남들이 다 높게 평가했고 좋아했고 잘됐다, 라는 논리니까 도무지 마음에 와닿지도 않고 꼰대 아저씨가 계속 자기 자랑하는 걸 듣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니 이건 대체 무얼 위한 자기 자랑인가요? 출마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아니면 나 이렇게 잘난 사람이니까 잘 봐둬, 라고 말하려는 걸까요? 너희도 나처럼 살아라, 라고 말하는 걸까요?


저는 이 분이 정말로 다음 세대의 공부를 걱정한다면 차라리 좀 겸손한 전략을 세워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무 자랑을 하시니까, 이 사람은 그냥 특별한 인간, 재능을 타고난 사람, 뭐든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분은 정말 모르시는 걸까요?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노력할 수 있는 것도 운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경력을 읊는 사람, 성공의 경험을 떠벌리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실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더 신뢰해요. 그런 사람이 누가 있었나? 라고 생각하니 오래 전에 다녔던 회사의 편집장님이 떠올라요. 그리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를 함께 만든 출판사의 주간님이 떠오르기도 해요. 정말 만나기 힘든 분들이지요.


이 책에서 가장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최재천씨가 그 미래를 걱정하는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는 대다수의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부모가 의대에 보내려는, 약대에 보내려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에요. 최소한 이화여대에 다닐 정도의 수준이 되는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도 그에게는 하버드대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보다는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분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가 열심일  있었던 데는,  자신이 기획하지 않았던 어떤 힘들이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요? 계속해서 자랑하시는 대로, 머리가 좋고 공부를   아는 사람이며 심지어 미술적 재능에 문학적 재능까지 타고난 것이지요. 부모님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은 못해줬어도 최소한 미국 유학의  학기 학비 정도는 대줄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주어진 것과 노력이 결합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재능과 노력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이런 것들을 ‘너희들도 나처럼 즐겁게 살아라’ 는 주장의 근거로 써야 했을까요? 책을 읽는 내내 저는 이것이 늙은이의 자기 자랑 같아서 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렸습니다. 대개 저는 이런 사람을 실제로 마주하면 썩소를 감추지 못하거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리곤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참을성이 지독하게도 부족하지요.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그 방향은 불만스럽습니다. 저는 저의 선생님 우치다 타츠루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비난하기는 쉽고 칭찬하기는 어렵다, 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가급적 비평은 (공식적으로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러나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기억해둘 만한 이야기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어요. (잘난 척이 너무 심하다는 것 말고는요.) 특히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기억해 두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너무 가르치려고 덤벼드는 것 아닐까? 침팬지가 배우듯이 몸으로 익히면 긴 인생에 훨씬 더 강력한 학습이 될 텐데, 급하게 욱여넣으려고 애쓰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우리가 교육하는 이유가 뭘까요? 사회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이 정도는 최소한 알아야 원만히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거라면, 과연 우리가 아는 걸 모두 가르쳐야 할까요? 특히 우리나라 시험 출제자들은 어떻게든 점수 차이를 내려고 얄궂은 문제를 내요.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나게 놔두지 말고, 사회 구성원이면 꼭 갖춰야 할 아주 기본적인 배움이 뭘까를 합의해내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최소한의 셈은 할 줄 알아야 하죠. 역사도 알아야 하고요. 단, 지금처럼 변별력을 주려고 시험 문제에 얄궂은 묘수를 부려 아이들을 고생시키는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는 모범생만 뽑는 것이 아니라 거름이 될 잡초들도 일정 부분 뽑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 집안 좋은 아이들만이 아니라 성적이 조금 떨어져도 이 학교의 분위기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학생들을 뽑는다고 해요. 그 아이들과 모범생들이 어울리면서 학교 안에 자유로운 분위기가 싹트고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최재천은 서울대학교에도 10%는 비보이라든가 하는 식의 다양한 재능과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뽑아 숨구멍을 틔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공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겠지요.


공정은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대개 너무나 불공정한 일들로 가득하니까요. 그러나 공정만을 외칠 때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경직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일인데요, 2학년쯤 되었더니 편입생들이 들어왔습니다. 다른 대학에 다니다가 시험을 보고 입학한 사람들이었지요.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방 대학에 다니다가 다시 수능을 봐서 저와 동기생으로 입학한 언니는 대단히 분개하더라고요. 공정하지 못하다고요.


나는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여기 왔는데 저 사람들은 너무 쉽게 무임승차했다는 겁니다. 저는 누가 들어오건 말건 그렇다고 나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가, 저 사람은 참 별 일에 다 분개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개 저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라면 무책임할 정도로 둔감한 편입니다.(이게 문제일지도 몰라요.)


남들이야 어떻든 잘 모르겠고, 저는 좀 느슨하고 유연해지고 싶습니다. 저는 잘 경직되는 타입이라서, 이렇게 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면 불도저처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런 성향 때문에 피를 많이 봤습니다. 이제는 좀 유연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번 불이 들어오면 멈추지 못하는 편입니다.


이 편지 교환도 말이에요, 설님도 알다시피 출간 제의들을 안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과연 이게 책으로 낼 만큼의 가치나 완성도가 있는가? 라고 생각했을 때 저는 사실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의 기준에서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서로 좀 더 열심히 써야 하는 거 아닌가? 프로 의식을 가지고? 라는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갑자기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버리지요.


자자, 어깨에 힘을 빼봅니다. 이건 그저 지리학적으로나 인지도면에서나 변두리에 있는 두 아주머니 작가들이 뜨개질을 하듯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제 겨우 1년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짜고 있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질지는 나중에 가봐야 아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저는 이 편지들이 그저 편안하게 인생과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매개가 되길 바랄 뿐이에요. 이 편지가 우리에게 일종의 공부가 되기를, 아니면 작은 해방의 몸짓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7월 14일

하도 이를 악물어서 이가 닳아버린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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