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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i aber Einsam Mar 12. 2020

잃어버린 7년의 시간

아침에 영장실질을 하러 가보니 머리를 회색으로 탈색하고 얼굴이 창백한, 야리야리한 몸에 키 크고 조용조용한 26세의 남성이 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노래방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는데 노래방관련 단속에 걸려 신원조회를 하던 중 7년 전에 저지른 범행으로 수배가 되있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결국 7년 전 사건으로 체포된 것이다.


그의 사연은 이러했다.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을 하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어머니에게로 보내졌다. 사춘기 무렵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되면서 그는 고아원으로 보내지게 되었고,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그는 여러 고아원을 전전하던 끝에, 다시 아버지와 살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세가되자마자 서울로 홀로 무작정 상경하였다.


서울로 왔지만 도움을 청할 지인도 하나 없던 그는 용산역 근처에서 노숙을 하다가 혼자 가끔은 또래와 돌아다니면서 돈이나 물건을 훔쳐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을 수 개월 하던 중 범행이 탄로나 경찰조사를 받고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 진행 중에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그는 노래방(아마도 일반적인 노래방은 아니었던 것 같다)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으나, 본인이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었고 감옥을 가게 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이 사실을 터놓고 상의할 어른이 없자 자취를 감춘 것이다.


피고인이 된 그를 접견하러 가서 물어보았다.

"왜 자수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나요. 돈도 좀 벌었을텐데 그걸로 배상하고 합의를 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관련 사건들의 피해액은 전부 합해도 백만 원 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너무 무서웠고,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물어볼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 핸드폰은 누구 명의죠?"

"예전 여자친구 명의입니다. 전세집도 아는 형이 명의를 빌려준 거고 돈도 아는 형 명의 통장에 들어가 있어요.잡히면 감옥 갈 거라는 생각에 지난 7년간 경찰만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대서 멀리 돌아서 길을 가곤 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잡혀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나가면 말소되었다는 주민등록도 다시 만들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


마음이 너무 아팠다. 

부모님이 키워주시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살아왔던 나로서는 그가 십대에 겪었을 현실이 너무 힘겨웠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19세에 집을 나온 이후로 부모와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때 그에게 더는 깊이 물어볼 수 없었다.


형사사건에서 "개전의 정"이라는 말이 있다. 바뀌고 교화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말하는 것인데 그는 진심으로 뉘우친다며, 내게 감사의 편지까지 보내왔다.

"판사님은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진심으로 뉘우치고 열심히 살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바쁘실텐데 제 사건을 국선으로 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는 개선의 정이 상당했고,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며칠을 고민했다.


나는 그의 국선변호인이었지만 "탄원서"(보통 지인, 가족이 선처해달라는 내용으로 작성하는 것. 반성문의 제3자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를 자필로 작성하기로 했다.

내 담당 사건에 탄원서를 쓰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별 내용은 없었지만 변호인의견서에 쓸 수 없었던 내용을 썻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런 호칭은 법정드라마에서 많이 나오지만, 사실 실제로 입밖에 내어 본적이 없다) 

죄를 지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적어도 그는 지난 7년간 죄 값을 많이 치룬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항상 숨어 살면서 경찰만 봐도 가슴이 두근 거리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어린 나이에 이런 잘못된 행동을 하였으나 주위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 홀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피고인의 안타까운 사정을 부디 너그러이 헤아려 주십시오."

대충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열심히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러 사건을 전부 모아 재판받게 되느라, 그 사건은 상당히 길어졌었다. 

재판장은 나이가 젊은 여자분이셨는데, 항상 법정에서 엄숙하고 센 포스를 풍기시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었으나, 판결문을 받아보면 피고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십 분 헤아려 주시는 분이어서 국선변호인 1년을 하고 나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판장이 된 분이다.  

재판결과는 검사의 구형에 비해 피고인에게 관대하게 나왔다. 검사가 항소를 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는 지금쯤 이미 죄값을 치르고 사회에 복귀했을 것이다.

그가 원하던 대로, 이름과 주민등록을 찾고 뜻하는 바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디 그가 이름과 꿈과 희망을 잃고 살았던 7년의 시간을 잊을 수 있을 정도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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