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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i aber Einsam Mar 10. 2020

재판장님, 저는 리라 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작년, 서울ㅇㅇ지방법원에서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되어 영장실질심사(체포된 피의자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는 것이 타당한지 심사하는 절차)부터 구속피고인이 사선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은 경우 1심 형사재판이 끝날때까

지 진행하는 사건을 맡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


국선 변호인으로 피의자를 만나게 되면, 가끔 '지금까지 내가 너무 곱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앞으로 국선변호인 활동을 하면서 있었던 많은 에피소드를 나눠볼 생각인데, 오늘의 에피소드는 활동 초반에 있었던 일이다.


국선변호인은 보통 당일 구속영장발부 신청에 대한 내용을 전달받고,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피의자를 접견(변호인이 피의자, 피고인을 만나는 것) 후 구속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하게 된다.


그 날도 아침 일찍 피의자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피의자는 60 정도의 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뭔가 현학적인 말을 잔뜩 하는 분이었으나 범행사실을 인정하는 상황이었다.


'아 오늘은 좀 수월하겠군' 하는 생각으로 영장실질에 임했는데, 갑자기 피의자가 재판장앞에서 전면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본인은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정색을 했다.

무엇보다

"재판장님 저는 리라 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응?'하는 심정으로 넋을 놓고 입을 벌리고 쳐다보게 되었다.

아마도 난 이렇게 좋은 사립초교를 나왔으니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으셨던 모양인데, 6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내세울 것이 그것뿐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나도 모르게 너무나 황당하여 웃음이 나왔다.


결국 영장이 발부되었고, 그 분은 기소되었다. 구치소 접견을 가서는 더 황당한 일이 있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고 나에게는 말할 기회를 전혀주지 않다가 갑자기 자기가 구타를 당했다며 뒤로 돌아 엉덩이를 반쯤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아저씨(보통 'OOO씨' 라고 호칭한다) 그만 나가주세요."라는 것으로 그날 접견을 마치게 되었다.


두 번째 접견을 갔을 때에도 여전히 말할 기회를 주지않고 그  혼자만 계속 얘기하던 와중에 느닷없이 영어로 한참을 얘기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뭔 줄 아십니까 변호님"  

"아뇨."

"제가 지난 재판에서(그 분은 범죄경력이 화려했다) 제가 최후진술로 한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문'입니다. 판사님도 무척 감동받으신 표정이더군요" (도저히 알아 듣기 어려운 발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25분을 듣다가 급기야는 내가 화를 내면서 나도 5분은 말 좀 하자고 했더니,

"변호사님, 정의롭고 바른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30분이 아니라 3일 종일 들어도 모자랍니다."라는 것이다.

그때만해도 초보 국선변호인이라 화가 버럭나서

"아니요. 저 그런 변호사 될 생각 없습니다. 다시는 접견 오지 않겠습니다." 라며 나와 버렸다.


그 분이 원하는 대로 모든 범행을 부인하고 증인신문을 잔뜩하고 몇 달 만에 사건을 종결하는 날이 왔다.

최후 진술에서, 그 분은 (살아계시지도 않은)구순이 넘으신 부모님을 위해 선처해줄 것을 구하고, (연락도 않는) 딸이 편지를 보내왔으니 그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며 줄줄 잘도 읊으셨다.

나는 그 순간 정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난감했다. 웃을수도 울 수도 없는 지경이었고, 이 사건이 드디어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이후에도 황당한 피고인을 많이 만났지만, 나에게 엉덩이를 보여주고, 케네디의 연설문을 영어로 읊고,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려면 3일의 접견도 모자란다며 혼자만 말하고, 최후변론에서는 계시지도 않은 부모님과 연락도 않는 딸의 있지도 않은 편지를 인용한 분은 다시는 없었다.


가끔 생각나는 대사,

"재판장님, 저는 리라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분의 그 말은 사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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