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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Aug 21. 2020

출산 후 100일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날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오늘도 특별히 별 것 없었던 평범한 하루였다.






출산을 했다. 그리고 100일이 지났다.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던 날이었지만 평범했다. 대신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고 팔이 저릿한 느낌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성격상 뭘 하나 준비하려고 하면 결정은 빠르지만 과정이 힘들다. 요즘 엄마들이 한다는 셀프 100일상을 알아보는 것도 은근히 스트레스 였다. 


출산 후 100일


굉장히 멋진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날이었다. '내가 출산을 한지 벌써 100일이 되었구나, 아기가 내 뱃속에서 나온지 100일이라니' 하는 사랑스러운 생각들이 나를 설레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100일이 지나고 보니 그런 색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육아는 정말 산넘어 산이라, 하나를 준비하면 또 다음 하나가 있고, 하나 하나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다가는 성가신 여정이 되기 일쑤라는 것만 깨달았다.


수유 하며 졸고, 기저귀 몇 번 갈고, 신생아와 의사소통의 문제로 한 숨 푹푹 쉬고 나니 어느새 나는 생후 4개월 엄마가 되어있었다. 조금 달라졌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엄마티를 살짝 벗어냈다는 것이다. 아는게 없는 그때의 나 같은 예비 엄마들에게 한 마디 정도는 전할 수 있는 제법 여유있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힘들었던 아기의 신생아 시절 기억이 연해지고, 임산부 였을 때는 내가 건강한 아가씨 였던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출산후 몸이 성한 곳이 없는 느낌이다. (몸의 근육이 정말 많이 사라졌다. 출산 전 운동 열심히!)


아기의 하루는 너무 짧고, 성장속도는 빨라서 설명할 수 없는 그 애틋한 감정에 충분히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아기는 풀어놔도 알아서 큰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보다. 이제는 아기의 나이를 계산하며 내 나이를 알 수 있고, 나를 대변해줬던 많은 것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오로지 남는건 '엄마'라는 큰 책임감 뿐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만족을 후하게 주는 사람이 아니다. 가끔은 완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가만히 쉬어도 될 하루를 오만가지의 정신없는 생각으로 보내면서 나를 대놓고 괴롭힌다. 

그 감정은 임신 막달 회사를 다닐 무렵에 찾아왔고, 또 출산 후 100일이 지난 지금 또 한 번 찾아왔다. 출산 휴가를 앞두고서는 10년 가까이 일을 했던 내가 갑자기 일을 손에서 놓으려니 괜히 그 후가 걱정되서 여러가지 두려움이 나를 괴롭했는데,  그 걱정은 또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닌 어리광이었고 오히려 그 때 아기가 없어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하루를 걱정하며 보낸게 미련해 보인다. 


그리고 출산 후 100일이 지난 오늘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만에 만이 더해진 육만가지의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를 보며, 출산 전 처럼 이번에도 몇 개월 후에 돌아보면 이 감정이 아무것도 아닐 것임을 알기 때문에 적당히 위로 받으려 한다.




나는 걱정을 가끔 사서하는 사람이다. 티베트 속담중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다 라는 말이 있지만 걱정을 사는 일은 내가 몇 번씩 하던 행동들이라 가까운 사람들에게 걱정이 많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조금 예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이런 성격과 정반대되는 사람이 나를 그나마 쉬게 해주니 바로 남편이다. (느긋의 대명사 = 남편)  

출산하기 전  '혹시나 나도 산후우울증 오면 어쩌지?'라는 물음에 '당신은 그런 것 없을 것 같다.  밝으니까' 라는 간단하지만 명료한 대답으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고리를 아애 차단해줬고, 아기 낳고 나서도 매일 밖으로 나갈 까봐 걱정이 된다는 농담으로 그 명료함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나도 가끔 잊어버리는 나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것도 배우자의 정말 큰 역할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서른을 앞두고서도 스물 아홉에 걱정을 하고 있었던 나에게 '스물 아홉은 뭔가 만들어지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서른의 너는 완성된 사람 같다' 라는 말로 나를 제법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돌아보면 서른이 참 예뻤다. 그래서 나는 서른의 나를 자주 찾아보곤 했는데 내가 제일 좋았던 순간은 서른이 아니라 서른에 결혼했던 그 이후의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는걸 알게됐다. 지나간 사진기록의 나는 항상 웃고 있다. 지금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고 했었던 그 날도 오늘 보니 별 것 아니고, 늘 좋았던 날이었다. 


별 것 아님, 그리고 늘 좋았던 날.

다가올 어떤 일, 어떤 날을 너무 특별하게 여겨 도달하기 까지의 시간 동안 나를 너무 괴롭혔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다 별 것 아닌 평범한 날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 그 평범한 날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무사히 지나갔다는 안도감 혹은 하나 해치웠다는 성취감에 가까운 감정들이다.



아기가 성장하는 동안 내가 마주하는 상황 그리고 처음해야하는 일에 나는 또 미리 걱정하겠지만 그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잊혀지고 다른 걱정과 불안이 그 감정을 쫒아내기에 바쁠거다. 별 것 아닌 일들이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것들에게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 하자니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아기의 100일은 참 좋았던 날이었고 벌써 지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일상이 순식간에 다가오니 너무 바쁜 하루다. 출산 후 100일은 아기가 태어난지 100일된 날일 뿐이었다. 오늘도 다가올 나중의 어떤 일, 어떤 것, 사건, 특정 시기에 신경쓰고 있는 나는 돌아보면 보면 별 것 아닌 날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날도 특별히 별 것 없는 평범한 날로 나를 안도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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