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주로

by 브라이언

자대에 전입온지 이틀이 되던 날,

나의 맞맞선임 김일병님이 나를 데리고 활주로 구경을 가셨다.

대기실에서 선임들에게 한 시도 쉬지 않고 필승거리는 내 모습을 딱하게 여기신 듯했다.


활주로를 면대면으로 마주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회색의 무정한 콘크리트와 티없이 검은 아스팔트는 그 끝이 어딘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끝없이 펼쳐져있었고,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은 그 뒤에 흩어진 도시의 파노라마를 중간중간 숨겨주느라 바빴다.

수평의 선들이 쫙 깔려있는 대지에서 고개를 좀 드니,

퇴근하는 오늘의 해가 스스로의 하루가 고되었다고 온 힘을 다해 유난을 떨고 있었다.

하늘은 그 벅찬 몸사리를 받아내느라 붉게 달궈진지 오래,

이미 그 끝자락에는 곧 찾아올 밤의 냄새가 조금씩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향기의 끝에는,

자로 잰 듯 하늘의 정중앙에,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뚱그런 달이 자신의 존재감을 맘껏 펼치고 있었다.

마치 해가 하나 더 떠있는 느낌.

단투인 행성의 루크 스카이워커에 잠시 이입했다.


이따금씩, 이 드넓은 활주로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새들이 이착륙을 한다.

배틀그라운드에서나 보던 수송기,

외관만으로도 그 속도를 어림잡을 수 있는 정찰기,

그리고 날카로운 네 개의 칼날로 하늘을 비집고 올라가는 헬기.

광활한 활주로 위로 그 말도 안 되는 기계들이 자유로이 뜨는 것을 보고있으면,

인류가 얼마나 위대한 종족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주먹도끼부터 초음속 제트기까지, 나는 가끔 우리가 진정 외계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밤의 활주로는 더욱 대단하다.

칠흑같은 어둠 속 펼쳐지는 도시의 불빛들은,

앞서 소개한 산의 병풍들을 무시하고 밤하늘을 걷어낸다.

상상 속의 지평선을 쭈욱 따라 야경을 훑다보면,

시선이 끊기는 곳이 생기는데 -

그곳에는 롯데타워가 우뚝 서있다.

‘크다‘라는 말로는 한참 아쉬운 그 유선형 구조물은, 밤이 되면 형형색색의 불빛을 내비치며 안그래도 대단한 위엄을 한껏 과시한다.

나는 다시 한 번 인류가 말도 안 되는 생물체들임을 느낀다.

언젠가는 풀과 돌로만 이루어져있었을 이 맨땅에, 저리 큰 문명의 비석을 세웠다라….

내 인간찬사적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노력해도,

이 종족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중간중간 마주치는 경외의 순간들이 너무 많다.

활주로 앞에 서서 멍을 때리고 있으면, 그 경외감에 필연적으로 도취되게 된다.

그리고 인류의 대단함과, 이 길고 긴 길 위에 놓인 나의 위치와,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30년 후의 내 모습과,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회상과….

따위의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나는 내 발에 감각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요새 날씨가 정말 춥다.

뻥 뚫린 활주로에 소리를 찢는 바람이 부는 탓도 크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코끝에까지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조금 더 멍을 때린다.

멍을 때리면 생각을 거시적으로 하게된다.

매일의 업무에 치이다보니 내게는 활주로 멍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몰아치다 확 한 템포 쉬는 느낌.

나는 멍때리는게 우리의 생존 본능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강한 확신이 있다.


활주로와 이별하기 직전,

나는 항상 보고싶은 사람의 얼굴들을 잿빛 바닥과 도시의 불빛에 얼룩진 하늘에 영사한다.

낮게 깔린 기온에 터져나오는 입김은 -

너무 신나버린 겨울바람에 실려 내 얼굴을 슭고 재빨리 사라진다.

이제는 확실해진 연말 분위기 때문인지,

휙휙 도망가는 입김 때문인지,

다시 돌아가서 뺑이쳐야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평소보다 얼굴들이 더 뚜렷하여 아련하다.

보고싶은 사람들이 많다.

들끓는 미련에, 혹은 살을 에는 추위에,

잘 작동하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돌아간다.

이 활주로 위로 내일 뜰 해와 달의 모양이 궁금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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