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by 브라이언

뭘 했다고 한 살 씩이나 더 쳐먹는 것일까.

올해 연말의 공기는 유독 무겁다.

한 해를 보냈다는 죗값으로 한 살을 더 먹이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싶다.


올 한 해, 나는 내가 어떤 과도기에 놓여 있음을 무척 자주 느꼈다.

‘나도 머리가 컸다’와

‘나는 아직 애새끼구나’가

끝도 없이 교차하는, 아리송한 시간들이었다.


몸이 좋아졌고,

얼굴은 조금 삭았다.

수염이 더 빨리 자라는걸 느낀다.

주량이 줄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사랑니가 썩었고,

친구 몇을 잃었지만 새로 사귀기도 했다.

남프랑스 일기를 쓰면서부터 글 쓰는 데에 맛이 들었다.

시간을 허비하는게 두려워 매일같이 헬스, 독서, 글쓰기를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방인, 백야,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집들을 읽었다.

오버워치 티어는 마스터에서 플래티넘으로 떨어졌다.

시나리오를 열댓편 가까이 구상하고 서너편을 촬영까지 마쳤다.

불닭볶음면 야끼소바 맛에 반하고 빠르게 질렸다.

인생영화가 <광란의 사랑>으로 바뀌었다.

사랑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우매함의 봉우리 위에서 떵떵거렸음을 깨달았다.


우리가족은 신촌으로 이사를 갔다 - 마음의 고향이 영등포에서 이촌으로 옮겨갔다.

이유이(이주현 유준상 이정현) 중 이촌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다.

로이드는 간암에 걸렸다.

아빠는 연남에 갤러리를 여셨다.

Official bois의 3/4은 군대에 갔고,

그중 이준용은 어느새 짬킹이 됐다.

정현이는 영국 억양이 생겼고,

혁진햄은 보스턴에서 카멜을 태우며 새벽의 제설차 소리에 고통받는다.

데이비드 린치와 오지 오즈본이 세상을 떠났다.


최근 마감 스태프 톡방에서 재현햄이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행복은 만족의 중첩이 아니라

불만족의 해소에서 온다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고.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나는 앞으로 존나게 행복할 수 있다.

불만족스러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나는 들끓는 자기혐오와 과한 자기애 사이에서 탭댄스를 춘다.

2025년은 그런 내게 넓디넓은 댄스플로어였다.


군대라는 공간이 나쁘지만은 않다.

물론 개같다.

그치만, 그 안에서 얻는 고요의 순간들은

사회에서의 지루함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를 지닌다.


찬바람을 면상으로 쳐맞으며

활주로의 지평선을 멍하게 바라볼 때,

허연 관물함 둘 사이의 딱딱한 뷰를 등지고 자려고 누울 때,

혹은 운 좋게 혼자 조용히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샤워할 때,

나는 하염없이 생각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한다.


전여친은 나더러 왜 이렇게 생각이 많냐고 말했었다.

자기는 여자 중에서도 예민한 편인데

어떻게 나보다 더 복잡하냐고.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는,

어찌보면 어이없는 이유로.


군대에 와서 난 생각이 더 많아졌다.

일례로,

나는 활주로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헬기들을 보면

회전하는 칼날 하나가 팅 부러져

나를 향해 날아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 거대한 칼날이 나를 스치기만 해도

나는 깔끔하게 잘려 사/람이 될 것만 같아, 그런 상황이 닥치면 땅바닥에 엎드릴지,

건물 벽을 차고 뛰어오를지 고민한다.

(결론은 높이 뛰는 쪽이다.

중력 때문에 파편은 땅으로 향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등 쓸모없는 망상과 시덥잖고 유치한 고민들 말고도 많은 생각을 한다.

대부분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이다.

내 사람들.

가끔 잿빛 콘크리트가 깔린 밤 활주로 앞에서 얼굴들을 그린다.

보고싶어 죽겠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 들면 한도 끝도 없이

슬프고 우울해지는 생각들도 많다.

그치만 다 끌어안고 살아야지 싶다.

그걸 피하면 너무 짜칠 것 같고,

무엇보다 나답지 못하다.

군대에 가면 사람이 자아를 잃는다는 말이 너무 싫다.

그래서 난 몸부림치고있다.

네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있는 것은 그 몸부림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최소한 나를 사랑하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난 진실되게 살아야된다.

힘들더라도 이게 맞다고 생각했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고있다.


한 해동안,

과거의 모범생 이주현이 보면

심히 못마땅해할 짓도 많이 했고,

말도 안 되는 용기도 내 봤으며,

꽤 많이 울었고

그보다 더 많이 웃었다.


아직 너무 불완전하고 불안정하지만

이게 평생 해결될거같지는 않다.

다만 일단 내년에도 이렇게만 살고싶다.

자살은 안 할 것 같다.

삶을 긍정한다.

어렸을 때부터 난 영원히 살고싶어했다.

되돌아봐도 후회없는 영원한 삶을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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