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르고 긴장되는 시작
홍대 인근의 한 게스트하우스, 창 밖의 술집에서 나오는 음악의 쿵쿵 거리는 소리가 전혀 막아지지 않던 아주 작은 더블룸에서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한 후, 엄마와 나는 공항철도에 올라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장만한 40L 배낭을 기내에 동반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받고 급히 짐을 나눠담고 부친 후 얇디 얇은 종이로 만들어진 영국항공 티켓을 손에 쥐게 되었다. 체크 인 후 급하게 덮밥류로 아침을 챙기고, 한국 휴대폰 요금제를 바꿔놓고, 미리 사놓은 유심칩을 배달받으면서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다. 금방 출국장을 가야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엄마와 오래 떨어진 적은 많다. 재수생 1년의 시간을 제외하고,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나는 늘 타지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실 2달이 크게 긴 기간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렇게 먼 거리를 오랫동안 혼자 떨어져 있어야한다는 생각에 종일 울적하고 예민했다. 엄마 역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꽤나 심란했을 것이다. 둘이서 정말 힘겹게 쿨한(?) 인사를 끝마치고 나는 애써 발걸음을 출국장으로 옮겼다. 출국장에서 줄을 서 있는 동안 벽틈 사이로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엄마가 계속 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울지 않으려 애썼는지 모르겠다. 왜이렇게 긴 시간을 굳이 떠나있겠다고 다짐한건지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억지로 등떠밀려 가는 사람처럼, 나는 내가 내린 결정에 내가 힘들어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둘러 면세품에서 햇빛이 그렇게 강렬하다는 유럽에서 써야 할 선글라스를 고르고 사느라 온 정신을 쏟아붓고는 겨우 게이트 오픈 시간에 맞추어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은 맨 뒷자석을 사전에 온라인으로 지정해놨었다. 두 좌석만 붙어있는 곳인지라 창문과 내 자리 사이에 공간도 조금 있어 내 물건을 수월하게 놓을 수 있었다. 옆자리에는 여행사에서 일을 하고 프랑스로 출장을 가는 중이라는 언니와 함께 앉았다. 간간히 자신의 대학시절 여행이야기도 해주시던 언니는 그 지겹고 지겨운 12시간 비행을 견디는 데에 큰 힘이 되주셨다. 외국인 승무원의 영국발음과 처음 겪어보는 긴 비행에 조금은 어색하고 어설프게 행동했지만, 함께 앉은 언니덕에 많이 웃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공항에서의 울적한 내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 런던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만 내게 남았다.
긴 비행을 끝마치고 바로 런던을 만나러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도 진짜 런던을 만나기에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까다롭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입국심사는 별 것 없었지만, 그 입국심사를 하기까지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야만 했다. 또한 숙소까지 가는 길도 지하철로 움직였기 때문에 1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하늘도 제대로 못본채 도착한 곳은 숙소 근처의 지하철역, Great Portland Street. 처음엔 튜브에서 나온 직후라 휴대폰 데이터가 2G만 연결이 되어서 유심칩이 고장난 줄 알았다. 하지만 역을 나온 후 몇 분간 계속 왔다갔다 하니 3G로 돌아와 숙소까지 큰 탈없이 잘 찾아갈 수 있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방을 찾아가 내 몸만한 배낭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첫 날을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보내긴 아쉬웠지만, 시간은 벌써 5시 반이었고 이 시간에 멀리 갔다오기에는 조금 돌아오는 길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셔츠만 간단히 갈아입은 뒤, 숙소 근처의 부츠에 들러 바디워시, 치약, 폼클렌징 등을 사고 테스코에 들려 저녁을 챙겼다. 장기간 비행에 티는 안나도 몸이 꽤 지쳤던 것인지 입맛이 크게 없어 간단한 간식정도로만 저녁을 해결했다. 불편한 구조의 샤워실에서 애써 샤워를 한 뒤 방에 돌아오자 다른 룸메들과 인사할 수 있었다. 내 방은 4인실이었는데 내 침대 위의 분은 한국분이셨다. 퇴사 후 한달정도 여행을 하시고 영국이 마지막 여행지셨던 분이었다. 고작 몇시간 외국에 있었다고 한국분이 그렇게 반가웠던건지.. 다른 침대의 1층에는 한 내 또래의 외국인 친구가, 2층에는 60대 정도로 추정되는 외국인 할머니 분이 계셨다. 이틀정도는 간단한 인사만 할 뿐, 얘기를 못나눴지만 며칠 후 나는 이들과 새벽까지! 자고 싶은데도! 수다를 떨게 된다.. 아무튼 첫날을 그렇게 보낸 후, 긴장 반, 설렘 반 잠을 청했다.
중간중간 여러번번 잠을 깨다 둘째날을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 날씨가 제법 화창했던지라 별 계획없이 런던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에 딱 좋았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한국에서 가져간 전압기가 잘 들어먹지 않았고 설상가상, 보조배터리도 먹통이었다. 결국 단 30%의 배터리만으로 낯선 길을 구글맵을 통해 돌아다니고, 사진도 찍어야했다. 네셔널 갤러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를 갔을 때는 미술관 안이니 휴대폰을 쓸 일이 어없었지만 어딘가를 찾아갈 때 구글맵과 GPS를 계속 켜놓는 게 생각보다 배터리가 쉽게 소모되는 일이었던지 금방 배터리가 닳았다. 그래서 그 날은 사진도 별로 못 찍었고,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갔을 때마다 충전을 시키기 바빴던 기억이 난다.
네셔널 갤러리 내부의 처음 보는 장식과 분위기는 참 인상깊었다. 17세기나 18세기 '살롱'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지만, 그 안의 모두가 그 공간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잘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생들 무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모여 앉아 큐레이터의 설명에 경청하고 있고, 다 같은 클래스를 듣는 건지 모를 한 무리는 접의식 의자에 앉아 내셔널 갤러리의 흉상을 스케치하는 데 몰두했다. 모두 착실히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경험했던 미술관들 떠올리면 너무 낯선 풍경인지라, 꽤나 그들의 집중한 얼굴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제 것처럼 이용하고 있어도, 실내가 정적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이후 2번 더 네셔널 갤러리를 찾으면서, 그것이 단지 평일 오전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커다란 갤러리에서 이따금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렁 등 아주 몇 안되는 여성 화가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는 마치 신화 속의 상징을 만난 듯한 기분도 느꼈다. 그런 다양한 감상들이 모여 그 공간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에도 날씨가 안 좋다 싶을 때에 그 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
네셔널 갤러리를 나오면 큰 광장을 하나 마주하게 되는데, 그곳이 트라팔가 광장이다. 트라팔가 광장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마자 든 생각은 우습지만, '아, 나 정말 런던에 왔구나.' 였다. 따사로운 햇빛과 적당이 시원한 날씨,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네셔널 갤러리 앞 잔디에 앉아 각자의 방식대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눈부신 물줄기를 뿜는 분수대와 그 속에서 관광객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동동 제 갈길을 거닐던 오리들, 그 위에 앉아 오후의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둥그렇게 광장을 지나치는 이층버스들까지! 분수대에 걸터 앉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버스킹 공연 노래를 배경삼아, 어떤 여행 블로거나 에세이작가도 부럽지 않은 기분으로 유럽의 광장 분위기에 심취해있었다. 휴대폰 배터리 걱정도, 내 예상보다 훨씬 서툴렀던 내 영어실력도 다 잊고 햇빛과 웃음소리들 사이에서 참 행복하게 즐겼다. 처음의 이미지는 어찌나 강력한지, 그날의 기억은 트라팔가 광장을 런던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가 되게 했고, 결국 여행의 마지막날에도 거기서 시간을 보내게 만들었다. 런던에 있는 중, 거의 매일을 지나치게 되는 곳이었는데도 말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네셔널 갤러리 앞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던 그 때의 기분이 생생하다.
아무튼 둘째날까지 나의 런던 여행은 비록 서툴었지만, 충만했다. 시작이 좋다는 느낌과 이번 여행이 잘 풀릴것이라는 기대가 제멋대로 부풀어 커진 날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런던의 날씨가 나를 지독스럽게 괴롭힐 줄은 꿈에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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