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 하지만 괜찮아.
갔다온지도 꽤 지났고... 순서없이 그날그날 기분따라 돌아다녔던지라 일정순으로 완벽하게는 여행을 정리할 수가 없을 것같다. 대충 쓰고 싶은 기억부터 순서없이 기록하는 게 차라리 더 빨리 써질 것같다.
둘째날은 참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였는데..우리가 서울에서 흔히 예상하는 4월의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덥지도 않고 시원하니 햇빛이 쨍쨍해 어딜 봐도 반짝거리는 그런 날씨.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런던을 다녀 온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런던의 냉혹한 날씨를 피할 수 없었다. 며칠이나 비바람이 몰아쳤고, 햇빛을 볼 수 없었다. 낮 기온이 7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40L배낭의 한계를 고려하여 여름 옷과 가을용의 얇은 재킷만 챙겨갔더니.. 나름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 추위에 강한 편인데도 조금 고생스러웠다. 쥬빌리가든, 영국 박물관, 미술관 등 실내 관광으로 주로 다녔지만,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겪어야만 했던 비바람은 가볍디 가벼운 차림의 여행자에게 참 얄짤없이 굴었다. 혼자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에 찬바람에 괴롭혀지면 꽤 울적했다. 둘째날까지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마냥 이색적이고 설레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차고 억센 바람속에 옷깃을 꽉 쥐어 여매며 걸어다닐때에는 그저 혼자 이곳에 어울리지 못하고 떠돌기만 하는 이방인이 된 기분에 사무쳐야만 했다.
영국박물관이야 뭐 어느 책을 찾아보던지 자세히 설명이 잘 되어있고, 박물관 내부에도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대여할 수 있기 때문에 관람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을 것이다. 어려운 점은 제한된 여행시간 안에서 박물관을 최대한 마스터해보겠다는 열혈 관람객에만 있을 듯하다. 난 애초에 고대 이집트, 그리스관만을 목적으로 두고 방문했다. 방문객들이 적진 않았지만, 로제타 스톤과 같은 핵심(?) 스팟만 뚫고 나면 편히 관람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라 신기하기도 했고 얻어가는 지식의 재미도 쏠쏠했지만, 어디까지나 강제로 탈취한 전리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마침 그 날 새로 들어온 도미토리 룸메가 이집트에서 온 친구였는데, 씁쓸한 일이지만 큰 반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듯했다. 나중에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거기 전시된 유물들 대부분이 이집트에 널려 있기 때문에 다시 돌려받으려는 정부 측의 요구가 다소 소극적이란다.(로제타 스톤만은 예외!)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것도 있을테니, 그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로 흘려들었지만 참... 4대문명이 시작된 나라는 유물도 차원이 다르게 많이 남아 있나보구나 싶었다. 언젠가 가볼 수 있었으면. 아, 물론 영국박물관에는 오리지널 영국출신 유물도 당연히 전시되어있다. 큰 감흥은 없었지만. 한 4시간 정도 둘러보고 나오니 비가 세차게 쏟아지더라. 점심도 못먹고 구경한 게 당이 떨어지는 느낌이라 박물관 바로 앞에 있던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커피도 마시고 폰도 충전했다. 이 때 외국 스타벅스니깐,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냥 옆에서 기다리라고만 하더라.
창 밖으로 내리는 비와 관광객들, 블랙 캡을 한참 구경하다가 이 근처에 위치한 페르세포네 북스 서점에 가보기로 했다. 절판되어 사라질 뻔한 여성작가들의 책을 다시 리커버하여 서점 이름과 동명의 자체출판사로 출판하기도 하는 것이 주된 프로젝트다. 자체 출판한 책 외에도 다양한 책을 판매하는데, 여성작가들의 서적만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이 서점의 아이덴티티다. 여행 초반이라 책의 무게가 부담이 되어 살 수는 없었지만, 엽서를 두장 집어왔다. 서점 자체는 아주 자그마하다. 얉은 음악소리, 걸을 때마다 마룻바닥에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계산대 근처에는 배달된 책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데 그 모양새가 꽤 운치있었다. 영화 캐릭터로나 나올 것같은 책벌레들의 공간에 들어간 기분. 작은 공간에서 열렬히 일하는 두 직원은 고요한 서점 안을 활기찬 분위기가 돌게끔 만들었다. 난 그 곳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을 걷는게 좋아> 원서를 사고 싶었다. 2주동안 있으면서 읽어보려고. 그런데 안타깝지만 그 책은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본래 제목이 <Street Hunting>이었던 걸 알게 되었다.(친절하게 종이에다가 써주기까지!) 내 전공을 설명드리자 두터운 카탈로그도 챙겨주며 읽어보라고 해주었다.
(나도 참 웃긴게, 여행하면서 만난 외국친구들에게 내 전공을 어찌나 그렇게 자신있게 밝혀댔는지 모르겠다. 세상 쿨한 목소리와 세상 당찬 표정으로 "Sociology" 그리고 "Gender study"까지 말하는 내 모습은 말하는 내가 느끼기에도 두려움 하나 없이 당당했다. 정작 한국 사람들한테는, 그리고 한국에서는 안그러면서... 어이없는 자신감이었다.)
아무튼 한국에서 트위터보고 찾아왔다고 하니 놀라며, 여행 세번째날에 이렇게 방문해주어 고맙다고 친절히 인사도 해주었다. 언젠가 영어 원서를 쉽게 읽을 수 있을 때가 되면 꼭 주문해봐야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주문할 수 있고 국제 배송으로 타국가 주문도 문제없이 받을 수 있다.)
런던 추위가 보통은 아님을 깨닫고 옥스퍼드 서커스쪽으로 이동해서 스카프를 하나 사들고 갔다. 2달동안 무리없이 들고 다녀도 될만한 크기와 두께,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의 스카프를 찾느라 시간을 좀 썼다. 결국엔 아주 무난한 가격과 무난한 디자인의 Mang* 스카프.. 마음에 드는 선택이었지만, 택에 한국어가 써 있는 것을 보며 조금은 현타가 오기도 했다. 런던까지 와서 한국에도 SPA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숙소에 돌아가 새로 들어온 친구와 한참을 인사했다. 그날은 처음으로 룸메들과 영어로 오래 대화한 날이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언론 전공 대학생 킴블리, 이집트에서 행사로 런던에 온 영화감독 니시마, 독일에서 온 분과 친해져 4명이서 새벽 1시가 넘도록 수다를 떨었다. 니시마는 런던에서 몇 년동안 영화공부를 하고 이집트에서 영화감독으로 활동중이었다. 런던이 꽤 익숙해보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로 일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하면서, 돈의 압박은 있지만 마음이 훨씬 자유로워 행복하다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중요순위를 정확히 알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매여있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 전공을 말하니 자신도 여성 영화감독으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하며, 우리 같이 파워를 보여주자며 함께 기합을 넣기도 했다. 에너지가 넘치고 표현도 참 큰 친구였다. 차기작으로는 종교테러 이전에 종교에 대한 압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준비중이라고 했다.(니시마는 이슬람 신도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신청한 적도 있다고 했는데, 머지않아 그녀의 영화를 한국에서 볼 날이 올 것만 같다. 마침 정상회담 직후의 날이라("You're from Korea?! Oh, It's your BIG DAY!!!" 이말을 몇 번이나 들었던지.. 여행에 와있는지라 친구들이나 주변사람들과 그 사안에 대해 얘기할 겨를이 없어 솔직히 정상회담이 별로 실감이 안났었는데, 주변에서 축하를 너무 많이 해줘서 그 덕에 정말 큰 일이 났구나 하는 기분이 들더라) 나에게 여러가지 물어봐주기도 했는데 영어공부 좀 더 했으면 더 많은 걸 말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좀 남는다. 아, 이집트 전통간식이라며 껌과 누가도 나눠줬는데, 그 누가가 정말 맛있었다.
킴블리의 유튜브나 주변에 한국에 관심이 많은 혹은 한국에 갔다온 친구들을 통해 들은 얘기들로 나에게 관심을 표현해주고 공감대를 만들어주는 배려도 고마웠다. 웬 처음듣는 노래를 알고 있어서 놀랐지만...딸기우유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크레용팝에서 나온 유닛노래를 어쩌다 듣고 남동생 놀리는 알람으로 쓴다고... 암튼 다들 여러가지를 알고 있어서 놀랐다. 손가락하트부터 시작해서 제주도의 해녀까지. 이때 독일에서 온 분이 해녀(한국어 해녀를 그대로 기억하고 계셨다)의 뜻을 물어보셨다. 음? 해녀? 글쎄.. sea...women...음.. 아! "lady of the sea!"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을 내뱉은 거였지만, 말하는 순간에 그 단어의 조합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주인처럼 바다를 누비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지는 말이었다. 내 대답을 듣고 친구들도 그 말을 멋있어했고 나역시도 그 어감이 좋아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아무튼 해녀에 대해 물어봐서 그 지역의 전통적인 직업이고 제주도의 상징이신 분들인데, 그 일 자체는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상황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흔히 한국에서 생각하고 알리려는 한국문화의 전형적인 모습보다 실제 외국인들이 보고 원하는 한국의 문화는 훨씬 더 스펙트럼이 넓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상식적인 것은 좀 알아놔야겠다싶었다.
yha london central 에서는 4박만 예약했기에 오래 같이 있지는 못했지만, 친구들 덕분에 하루종일 추위와 낯섦과 싸워 못내 쓸쓸했던 마음을 잘 달래며 하루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참 고마웠다.
그 다음날은 뮤지컬 <Matilda>를 보려고 계획해둔 날이다. 데이시트를 이용했는데, 수요일과 토요일은 마티니공연을 열어 하루 공연이 2번 이뤄진다는 것을 듣고 더 좋은 자리를 얻을 확률이 클 것 같아서 토요일로 계획했다. 여기서 잊지 못할 첫 동행 ㄱㅎ언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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