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후미코 <삼등여행기>

필연과도 같은 작가의 여행길

by 카밀라

2월도 거진 끝나가고, 이제는 2018년이 '지난'해가 된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지난 해 다녀온 2달간의 유렵여행 기록하기는...망했다. 너무 꼼꼼히 쓰려고 해서 문제였던 걸까. 아니, 그냥 개강하고 복학하면서 머릿속에서나 마음속에서나 제대로 잊혀져버렸다. 여행에서의 추억과 그때 얻은 에너지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기록하려는 의지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어이없는 내 자신을 좀 타일러 보고자, 혹은 위로해보고자 타인의 생생한 여행기를 읽고 싶었다. 고른 책은 정은문고에서 출판한 하야시 후미코의 <삼등여행기>(부제 : 도쿄에서 파리까지)다. 하야시 후미코는 일본의 대대표적인 근대문학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지는 않았어도, 대표작 <만국> 내게도 익숙한 제목이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해외로 여행을 가고 장기여행이나 출판을 개인이 시도하는 것의 장벽도 많이 낮아진 시대이다. 어느 서점을 가도 여행 가이드서는 물론, 흥미로운 경험을 가진 작가들의 여행 에세이도 한 무더기를 찾을 수 있다. 스마트폰과 구글맵앱, 트립어드바이저 평점 등으로 어느 때보다 여행이 쉬워지고 빨라졌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보다도 나만의 것을 여행길에서 만나기 힘들어진 때인 것 같다.


이런 시대에 정은문고는 특별한 에세이들을 출간해 색다른 재미를 독자에게 가져다 준다. 정은문고가 출판한 산책에세이들은 스마트폰이나 구글은 커녕 배나 기차로 다른 나라를 가는 것이 훨씬 보편적이던 시대의 여행기다. 키워드 하나로 수백페이지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요즘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 건너 건너 수소문해겨우 찾은 사람 한 둘에게 그만의 장소를 얻을 수 있을 뿐인 시대. 그마저도 몇가지 되지 않아 오로지 나의 지식과 호기심으로 탐색하는 여행을 해야하는 시대의 여행기다. 일전에 동일 출판사에서 출간한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를 흥미롭게 읽었던 지라, <삼등여행기>에 대해서도 기대가 높았다.


하야시 후미코는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무려 철도로 건너 유럽 대륙으로 이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위태로운 시대, 2주간 삼등칸에 그리고 여행의 중점을 두었던 파리에서 자신이 만난 각국의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나름대로 지켜보고 느껴보는 작가의 시선은 순수하고 따뜻하다. 단순히 풍경과 경치만을 묘사하는 에세이가 아니다. 군데군데 그 시대가 겪는 갈등이 드러나는 대목이 나타난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사상아래 노동자가 겪는 실제에 대한 작가의 분석과 다정한 공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여느 세계사의 냉정한 문장과 달리, 정치적 갈등에서 가진 것 없는 개인이 애써 모른 체하는 두려움과 그걸 덮는 해학에서 나오는 훈훈한 습기를 하야시 후미코는 독자들이 감각적으로 느끼게 전달했다.



일본의 노동자 농민은 도대체 러시아의 무엇을 동경하고 있는 걸까요? 그럼에도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는 변함없이 프롤레타리아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죄다 특권자는 특권자입니다. 3루블의 기차 식당에는 군인과 인텔리풍의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복도에 서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중에 군인이나 인텔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의 모습이었습니다. (51P 中)



발없는 남자와 탄흔 있는 노인을 보니 베르됭 전투가 떠올랐습니다. 과연 독일인과 프랑스인은 기차 안에서까지 사이가 나쁜지 "이렇게 불경기인데도 구태여 옆에서 일하러 오는 건 참을 수 없어!" 건너편 칸에 있는 독일 노동자가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삼등 열차는 하나의 가족 같으니 어찌된 일일까요? 한가로운 익살꾼이 많은 덕에 언제까지나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무산자의 모습이란 아무리 인종이 다르다고 해도 보통 단벌 신사로 조선에서 파리까지 다들 같은 풍채입니다. (64P 中)


파리와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작가의 제국을 경험하는 동양인 여성으로서의 자아, 작가로서의 자아가 보다 심도 있게 다뤄진다. 물론 조선과 중국 등을 침략하고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통치를 행하던 일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소 순진무구하게 구는 부분이 난감하지만.


식민지라고 하니 파리 카페에서 내게 말을 건 어떤 신사가 떠오릅니다. "마드무아젤, 당신은 인도차이나에서 왔나요? 요즘 식민지는 어떤가요?" (146P 中)


시대를 읽는 시각과 더불어 그녀의 여행기의 가치를 둘 수 있는 또다른 포인트는 작가로서의 자아와 씨름하는 모습이다. 2주간은 숙소에 콕 박혀 잠만 잔 것을 반성하기도, 어떤 날은 다른 작가의 얘기를 전해들으며 자극을 받기도, 어떤 날은 영감이 충만한 공간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바쁘게 바뀌는 모더니즘의 일본을 잠시 떠나 비교적 유행이 느리게 변하는 유럽은 작가에게 넓은 공부의 터였다.


대륙에 와서 알게 된 건 유행 속도가 극히 느리다는 점입니다. 문학은 더욱 그러해서 일본처럼 무슨 무슨 이즘이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술가들도 어딘가 느긋합니다. (151P 中)
파리 여행중인 하야시 후미코



난감한 부분들을 자체적으로 필터를 써서 패스(?)해가며 읽게 되기는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면 <삼등 여행기>는 길바닥에서 세계를 읽는 작가의 시선을 마치 내 것처럼 빌려 쓰며 함께 세상을 읽을 수 있다. 그만큼 생생하고 가까이 관찰하여 쓰진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몇 푼 남지 않은 생활비에 근심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프랑스어를 배우고 연극과 영화를 찾아 다니며 끝없이 어제의 나를 새롭게 갱신하는 것을 기록하는 작가의 여정은 여행보다는 어쩌면 삶에 가깝다.


90여년 전의 여행기. 하야시 후미코의 여행기는 그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요즘 우리의 것과는 속도도 감성한참 르다. 그리하여 여행이 개인에게 큰 역량을 키워주는 단 하나의 방법은 아니지만, 최소한 '하나의' 방법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유쾌합니다. 인간이 커지는 느낌입니다. (153P 中)


책의 말미에는 하야시 후미코의 인생 이력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이는 정말로 날때부터 나그네인, "숙명적인 방랑자"더라. 고단하고 괜시리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 그녀의 인생을 알고서 읽는 삼등 여행기는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이야기일 것이라 믿는다. 이런 여행, 이런 감상을 기록하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마냥 빠져들어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1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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