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간직하는 가장 고귀한 태도

1.27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by 카밀라

바람이 차고 하루종일 조그만 빗줄기가 흩뿌려지듯 내린 설연휴의 마지막 날, ㅇㅁ와 광화문의 에무시네마에 갔다. 목적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작년 부국제에서 공개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화제된 작품을 오늘에서야 볼 수 있었다.



작년 11월 <윤희에게>도 그렇고, 자극적이지 않고 male gaze의 영향이 적거나 없는 작품을 자주 볼 수 있어 좋은 요즘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역시 성애적인 것보다는 미묘하거나 인물의 숨겨진 감정선의 표현에 더 집중한 영화다.


화가 마리안느는 18C 프랑스에서 "여성"화가로 일한다. 마리안느는 거친 바다를 작은 나룻배 하나로 해쳐서 새로운 고객의 초상화를 그리러 도착한다. 고객의 이름은 엘로이즈. 큰 저택의 둘째딸인 그녀는, 밀라노의 귀족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언니의 자살로, 그 운명을 대신 수행하기 위해 수녀원에서 돌아왔다.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주문한 초상화를 마리안느가 완성하는대로 엘로이즈는 밀라노의 남자와 결혼하러 떠나야 한다. 일주일 남짓 약속된 시간동안 자신을 산책친구로 속이면서 엘로이즈를 관찰하는 마리안느. 그림을 위한 관찰은 사랑으로 변하고, 마리안느는 초상을 완성했지만 자신의 존재감이 깃들어있지 않다는 엘로이즈의 말에 그림을 훼손한다. 결국 마리안느는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얻고 새롭게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며칠의 시간을 더 얻어 엘로이즈와 함께 지낸다.



*스포



결국 두 사람은 초상화가 완성된 뒤, 헤어진다. 다시 서로가 재회하여 함께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으로 허용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관객이 원하는 결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말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변인들과 나 자신까지, 우리는 영화를 본 후 행복하다고 느꼈다. 왜 함께 하지 못하게 된 연인의 이야기에 우리는 충만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돌아온 것일까?


뮤즈의 의미


흔히 예술가와 모델의 사랑 이야기는 창조자-대상의 관계로 치환되어 왔다. 대상은 창조자에게 온갖 영향을 주는 존재이면서도 관계에서 수동적인 위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창조자는 대상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휘둘리지만 결국 대상을 형상화한 창조물을 소유함으로써 끝까지 관계의 주체로 남는다.


이런 구조는 영화뿐만이 아니라 소설과 회화, 조각의 장르를 불문하고 이어진 전통이었으며, 그 어떤 인물간에서도 깨지기 어려운 관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관계를 통해, 이러한 관습을 명백한 언어로 지적하고 부수어 뮤즈의 의미를 다시 정의한다.


영화 초반, 마리안느는 "그림이 맘에 들면 밀라노로 곧바로 갈 것"이라는 엘로이즈의 모친의 말에 "그럼 밀라노로 가시겠네요."라고 맞받아칠만큼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화가였다. 이런 마리안느에게도 한계가 있었다면 회화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에 유념하느라 인물의 감정과 존재감을 담아내는 데에는 부족했다는 것. 첫번째 그림을 엘로이즈에게 보여줄 때, 엘로이즈는 자신과 비슷하지 않다며 그림에 결핍된 부분을 지적한다.


여기서 마리안느는 예술에 굳은 심지와 투지가 있는 화가였던지라, 엘로이즈의 이러한 지적에 과감하게 그림을 지우고 다시 기회를 찾는다. 그리고 두번째 기회에서는 자신의 모델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엘로이즈를 알아간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거짓없이. 이후 엘로이즈를 알고 사랑하게 된 후 마리안느의 그림을 꼭 비교해보길 바란다. 그림 속 엘로이즈의 눈빛을 특히.


엘로이즈의 몇몇 대사들 역시 마리안느의 생각이나 기존의 예술 전통을 향해 이렇게 지적을 던진다. 그림을 그리는 중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무의식적인 습관을 얘기하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자신의 자리로 와보라고 한다. 화가와 마주하는 모델의 자리로.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가 누구를 보고 있겠어?"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이 그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델 역시 자신의 화가를 관찰한다. 화가못지 않게 세세한 부분까지 보고 캐치할 수 있다. 마리안느의 무의식적인 버릇을 지적하면서 엘로이즈는 자신 역시 이 관계에서 동등한 영향력을 쥐고 있음을 암시한다. 마리안느 못지않게 자신 역시 상대를 사로잡고 있고 사로잡혀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남성적 시선에 대한 감독의 견해가 이 영화에 자주 드러나는 데, 그 중 한 장면이었다.


또 하나 의미있는 대사는 (역시 엘로이즈의 대사)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무언가를 창조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


이미 당신과 내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두 사람은 전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악마같은 유혹의 능력만 갖추고 창조적이고 유의미한 일에는 무능, 무력한 것처럼 그려지던 뮤즈는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사랑에 빠진 순간, 인간이 만드는 감정과 의미는 계발되는 능력이 아니라 본성이다. 누구나 뮤즈이자 창조자이며, 둘 사이에 경계가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기억하는 것. 사랑을 간직하는 가장 고귀한 태도.


엘로이즈의 모친이 돌아오기 전날밤, 두번째 그림은 성공적으로 완성되었고 기한이 정해진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도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만남과 추억을 후회하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기로 한다. 화를 냈거나 사랑에 빠진 순간까지 모두.


이 연인의 결말은 사실 미리 제시된다.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관한 신화이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그리고 시녀 셋이서 신화의 내용을 책으로 읽는데 오르페우스가 마지막에 이승으로 통과하는 문 앞에서 에우리디케를 돌아보고 마는 바람에 결국 저승에 에우리디케를 남기고 영영 헤어지게 된 부분을 읽었다. 오르페우스가 왜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헤어지게 했냐에 따라 셋의 의견은 제각기 다른데, 이 부분에서 셋의 캐릭터가 분명히 나타나는 한편, 영화의 결말이 암시된다. 시녀는 오르페우스의 바보같은 행동에 화를 내고, 마리안느는 그것이 시적인 선택의 행동이었다며 오르페우스를 변호한다. 여기에 엘로이즈는 왜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뒤돌아 봐"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다시 말해 그 사랑을 시적인 것으로 남기기 위해 헤어짐을 선택한 것이 에우리디케였을 것이라는 것.


모친은 저택에 도착했고 그림을 확인했다. 만족한 모친은 대금을 지불하고 인사를 나눈다. 시녀와도 인사를 나누고 엘로이즈와 마지막 포옹 후 도망치듯 저택의 대문을 막 나서려는 마리안느를 엘로이즈가 불러 멈춘다. "뒤 돌아 봐." 엘로이즈를 잠시 바라보던 마리안느는 대문을 닫고 나간다.


당연히 이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사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재회아닌 재회를 하게 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작별을 다룬 작품을 발표한 살롱에서 엘로이즈와 그녀의 딸의 초상을 발견한다. 그 그림에 남은 마리안느를 향한 사랑의 기호(영화로 보세용)를 통해 마리안느는 간직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이자 마지막 재회는 오케스트라 극장이다. 두 사람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발견조차 못했다. 하지만 그 극장에서는 언젠가 마리안느가 진짜 음악이라 말했던 곡이 연주되고 있었고 엘로이즈는 혼자 울고 웃으며 음악을 듣는다.


두 사람이 계속 고객과 화가의 관계로 엘로이즈의 결혼 후에도 밀회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가씨>처럼 돈을 들고 도망쳐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관객이 그 결말을 원하지도, 실제 이 영화가 그렇게 끝나지도 않았던 것은 에우리디케의 선택을, 두 사람이 사랑을 간직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헤어짐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아름답게 두 사람의 사랑이 남는, 고귀한 방식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헤어짐'이라는 어디에나 보이는 진부한 결말이 고대 신화의 재해석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적절한 해석으로 가능한 최대로 "아름다울 수" 있게 그린 영화였다. 즉 사랑의 보존에 대한 섬세한 고찰과 결론이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납득가능한 결말과, 헤어진 결말에도 불구하고 끝나지 않은 사랑의 힘을 충만하게 느끼고 돌아오게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극이라는 점, 두 여성의 사랑을 주제로 한다는 점, 신분에서의 상하관계가 있다는 점, 한 사람이 원치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점 등에서 <아가씨>와 비교하면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은 많은 퀴어영화가 비판받는 지점이자 <아가씨>역시 피할 수 없었던 부분인 성애장면의 남성중심적 재현이 없다는 점, "관찰", 그리고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영화의 해석에서의 차별점이 많은 입소문과 인기를 끌었을 것이라고 공감되었다. 쓰잘데기 없는 대사만 날리고 방해하는 남성 조연조차도 등장하지 않아, 이야기가 더욱 편안하고 매끄럽다. (아, 한 사람 나오는데 대사가 "봉쥬르"가 다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에우리디케 설화를 차용한 것과 함께 모닥불을 두고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 아주 강렬한 감정을 준다는 것이다. 프랑스 지방의 민속민요일까? 그 곳에 모인 여성들의 독특한 합창이 관객을 삼킨듯이 울리는 와중에, 불길에 휩싸인 듯한 엘로이즈의 응시는 마리안느는 물론이고 관객에게까지 강한 힘을 전달한다.




아직 영화는 예술의 장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학, 회화, 조각, 건축까지였나?

그런데 나는 대체로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가끔 가다 이만큼이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회화가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을 이미 달성하고도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말이다. 다른 매체가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영역을 교차시키면서도, 훼손없는 감정을 관람자에게 그대로 통과하게 할 수 있다는 점. 꼭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영화관에서 느꼈으면 좋겠다.



+아니 근데 나도 어쩔수없는 촌사람인건가. 엘로이즈 배우와 감독이 옛연인 사이었다는 것을 알고 보면서, 왜 이렇게 서로에 대한 메세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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