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Day 10 산토도밍고 - 벨로라도 22km

by ㅇ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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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서 광활한 밀밭이 펼쳐진 길. 부엔 까미노라고 건물벽에 크게 누군가 낙서를 해놨다. 친숙한 한국어가 반가웠다. 발목이 아파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쉬엄쉬엄 걸었다. 도저히 속도를 낼 수 없는 상태였다. 어제부터 절뚝거리며 걸어서인지 많은 외국인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엔 일본인 미야와 호세씨와 좀 걷다가 아침을 먹었다. 쇼콜라 빵에 커피 한잔을 뜻밖에 외국인들이랑 함께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호세씨는 스페인 사람이었는데 몇 번 이 길을 걸어본 듯했다. 여기 스페인 분들은 여러 번 이 길을 걷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일 년에 세 번 걸었다는 분도 봤는데, 누군가 너 부자구나 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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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다가 내 걸음으론 따라가기에 민폐일듯하여 먼저 보내고, 다시 홀로 길을 걷는데 이번엔 독일인 친구가 말을 걸었다. 세바스찬과 부말리아였다. 세바스찬도 저번부터 낯이 좀 익은 얼굴이었다. 여기를 왜 걷냐고 물었고, 문화에 대한 이런저런 호기심이 많았다. 한국사람들이 여기 왜 많이 오냐는 게 이 곳 단골 질문이다. 한국사람들이 산을 좋아하고 걷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한국에도 규모는 작지만 이와 유사한 올레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고 보면 어떤 면에서 제주도와 닮은 구석도 있다. 바다는 없지만 오름을 생각나게 하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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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누군가 해바라기에 얼굴을 만들어놓은 것을 보곤 마음이 밝아졌다. 너무 귀엽게 생겼다. 아마 이곳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저 해바라기를 보며 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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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발목이 더 아팠다. 겨우겨우 벨로라도 입구에 도착했는데, 마을 입구에 식당 겸 알베르게가 보였다. 저기도 좋아 보이는구나 하고 지나치려는데, 어제 만난 몰튼이 나를 불러 세웠다. 여기 자기가 예전에 묵었던 곳인데 좋았다며 우리와 함께 묵자는 것이었다. 이 곳에 수영장이 있어서 발목 찜질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며.. 원래 다른 숙소에 지낼 예정이었는데, 조금 당황했지만 약속을 정한 것도 아니기에 여기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몰튼과 슈쉬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의 유럽인 친구들이 있었는데 4명이서 학교 친구들로 함께 여행을 다니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좋은 아이들이었지만 내가 어설프게 끼니 조금 어색했다.

숙소는 굉장히 쾌적하고 좋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을에 있는 꽈트로 깐또네라는 알베르게에서 지내는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에 호세씨가 추천해줘서 나도 그곳으로 갈 예정이었다가 이곳에 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숙소는 무척 조용했다. 그래서 더 좋았던 거 같기도 하고..

씻고 나오니 선선한 바람에 숲이 흔들리고, 쾌청한 날씨와 정취에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혼자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또띠아와 샹글리아 한잔을 했는데, 야외 테이블에서 한잔 하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었다.

벨로라도 마을도 한 바퀴 산책하고 와야겠다 싶어서 무거운 발을 이끌고 산책을 나왔다. 이름이 예뻐서 마을의 분위기가 무척 궁금했었다. 발이 아무리 아파도 여기 다시 와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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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에스타 시간이라 마을은 조용했지만, 예쁜 동네였다. 걷다가 아마도 한국인 아르바이트생이 일한다는 숙박 집 앞에 놓인 의자에 적혀 있던 문구였는데, 저 말이 마음에 남았다.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왠지 위로가 되었다. 사랑받지 못했던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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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배가 아직 다 안 꺼진 시점에 몰튼이 같이 저녁 먹겠냐고 물었다. 그냥 물어보았을 수 도 있는데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는 순례자의 정식을 시키고, 그들은 각자 인당 피자 한판씩 시켜 먹었다. 각자 서로 다른 피자를 시키고 자기가 시킨 피자만 한판을 혼자 다 먹는 것이 신선했다. 나는 한국에서는 보통 나눠먹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짧은 영어 실력이라 너희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오해할까 봐 묵묵히 순례자의 정식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들의 피자 한판보다 나 혼자 먹는 순례자 정식의 양이 더 많았을 것 같다. 배도 부른데 꾸역꾸역 아무 말 없이 혼자 닭다리를 묵묵히 먹고 있는 내 모습도 그들에겐 신선했을 것 같다. 말없이 밥을 함께 먹고 나니 더 어색해진 것 같다. 한국어 인사라도 좀 알려줬으면 분위기가 유연해졌으려나.. 이런 상황 속에 긴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참 감사한 인연들이다.


밥 먹고 수영장 물에 발을 찜질하니 한결 나았다. 가뜩이나 두꺼운 발목인데, 부으니까 이젠 발목 없이 다리에 발이 그냥 붙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은 시간은 혼자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아늑한 침대에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네 명의 친구들이 함께 여행을 온 걸 보니 참 좋아 보였다.


어설펐지만 오늘 만난 인연들 하나하나 다 감사했다. 모두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만나는 모두가 너를 도와줄 거라고 들었던 얘기가 떠오른다. 여행자로 만나게 되면 친절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일상에서도 여행자처럼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국에 돌아가면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