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늘 아래

Day 11 벨로라도 - 아헤스 27km

by ㅇㅁ

어제 냉찜질을 한 탓인지 잠을 푹 잔 탓인지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6시가 좀 넘은 시각에 방안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만큼 날씨가 무더워지고 있는 탓이었다. 아침엔 흐릿하고 안개 낀 하늘이었다가도 점심 무렵엔 맑고 쨍해진다. 오늘은 많이 걸을 수 있겠다 싶어 쉬지 않고 걷는데 역시 좀 더 걷다 보니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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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소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는 구간이었다. 빼곡한 소나무 숲은 어딘지 익숙하다. 여긴 제주도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날이 흐리기도 했고 숲을 걸으니 오늘은 좀 덜 덥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이 걷혀 더워지고, 계속 걸으니 뭔지 모를 짜증이 났다. 무엇보다 날파리가 계속 얼굴에 들러붙어서 짜증스러웠다.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들 늦게 일어난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다들 일찍 출발한 거였다.


혼자서 짜증을 팍팍 내며 걷다 보니 셀프 미니바가 보였다. 과일과 음료를 먹으며 좀 쉬어갔다. 몰튼과 세명의 친구들도 보였다. 어제 몰튼에게서 펜을 빌려 순례자들이 가방에 달고 다니는 조개껍데기에 소원을 적었었는데, 몰튼이 뭐라고 적은 거냐고 물었다. 난 행복이라고 적으려다가 순종이라고 적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거운 말을 적었구나 싶은데.. 그냥 결혼하게 해 주세요! 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게 해 달라는 말 같은걸 적을걸..몰튼이 갸우뚱해했다.

몰튼의 조개껍데기에는 2015 camino , 2016 camino, 2017 camino 가 적혀있었다. 매년 오고 있다고 했다. 젊음이 부러웠다. 나도 또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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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테가쯤에 오니 점심때가 되었다. 하나 더 갈지 여기서 머물지 고민이 되었다. 일단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해보자 싶어 바게트 빵에 맥주 한잔을 먹었다. 허기와 갈증을 채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아헤스까지는 4km 정도 더 가면 되니 1시간 정도 더 걸으면 된다. 힘이든데도 오늘은 왠지 더 걷고 싶었다.

오늘 많이 걸어두면 내일 좀 덜 걸어도 되니까.. 내일은 부르고스에 도착하는 날이다. 부르고스는 팜플로나 이후로 제일 큰 도시고, 관광지라 기대가 되었다. 내일 부르고스를 좀 구경하려면 빨리 도착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 더 많이 걸어두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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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헤스까지 걷는데 더위가 절정에 달하였다. 그렇지만 하늘은 너무 맑고 푸르며 상쾌했다.

어느덧 언덕을 올라 주변을 바라보니.. 잠시 멈출 수밖에 없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너무 더운데도 사진 찍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큰 나무 그늘아래에서 계속 쉬면서 이곳저곳을 담아 두기에 바빴다. 내 뒤에 할머니 한분이 오고 계셨는데, 미국 할머님도 뷰티풀~ 을 연신 외치시며 감탄하셨다. 더우실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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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다했다는 말이 어울리게. 하늘과 구름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잠시 멈출 수밖에 없는 풍경들.

더 걸어가기가 아쉽게 머물고 싶은 순간.

걸어가기 짜증스러운 곳도 있었지만 지나가면 곧 머물러 있고 싶은 곳도 나오니까.. 이러나저러나 다 지나가야 할 길이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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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헤스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도착하니 미야가 반겨주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사람들을 보니 괜스레 반가웠다. 몇 개 숙소가 있었는데, 아무 곳이나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던 것 같다.

씻고 방 안에서 쉬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투어 하는 무리들 5~6명이 시끌벅적하게 들어왔다.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옷을 갈아입으니 민망하고 살짝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설마 나 혼자 여자인건가 했는데, 다행히 방안에 나 빼고 한 명 여자분이 더 계셨다. 산티아고에 오기 전엔 혼숙 게스트하우스는 생각도 못해봤는데, 이젠 어디든 가능할 것 같다. 아니 그래도 산티아고이기에 좀 더 안전한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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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두분도 이 곳 숙소로 오셨다. 방은 다르지만 안심이 되었다. 내 발목 상태를 보시더니 파스를 주셔서 오늘은 파스를 붙이고 잘 수 있게 되었다. 발목 상태는 호전되어갔다. 식도염도 나아가고, 컨디션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숙소에서 순례자의 정식을 먹었는데 가격 대비 꽤 괜찮았다. 수프 , 샐러드, 치킨 빠에야, 디저트, 와인을 먹으며 아주머니들과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저녁에 쉬다가 아까 마을과 가까이 있던 언덕 풍경이 자꾸 생각나 다시 가볼까 싶은 한 마음이 들었다. 노을 지는 모습도 정말 아름다울 것 같았는데..

내일은 드디어 부르고스에 입성하는 날이다. 잘 걸어왔다..더 잘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