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7 테라디오스 - 벨시아노 24km
새벽에 출발하는데 별이 보인다. 숙소가 좋았지만, 방이 불편했고, 벌레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잠을 잘 못 잤다. 한 번도 걸으면서 자고 싶다거나 피곤해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걷는 것이 조금 졸렸다. 긴장이 풀린 것일까.. 새벽을 걷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어제 오전부터 더웠고, 숙소를 잡기 힘든 상황이 오니, 사람들이 더욱 일찍 출발하는 것 같았다. 몸에 힘이 없고, 울적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해가 뜨고 걷다 보면 또 기분은 좋아질 것이다.
새벽 어두운 길을 걷는 게 좀 무서웠는데, 내 앞으로 가족들이 걷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같이 걷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전을 열심히 걷고 사하군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반주증을 준다고 들었다. 꽤 의미 있는 곳인 것 같은데, 둘러보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늘은 엘부르고 까지 갈지 벨시아노에서 멈출지 고민 중이 었기 때문이다.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았는데 벌써 지쳐있었다. 반주증을 주는 곳을 찾다가 아무래도 어딘지 모르겠어서 마을 어딘가 빵집에서 커피와 빵을 먹으며 쉬었다. 눈에 익은 많은 순례객들이 지나쳤다. 기차가 지나가는 길 위로 오래된 도시의 정취가 아름다웠다. 중세 유적이 많은 곳이라는데 뭔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인 가보다. 관광지의 느낌이 들었다.
구석구석 마을을 살펴봤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뭔가 조급해져서 순례길로 넘어가기에 바빴다.
그리곤 사하군에서 벨시아노로 걷는 길에 마주한 꽃길이 무척 아름다웠다.어쩐지 불편했던 마음도 길을 걸으며 내려놓을 수 있었다.
까미노 여행 중 한국인 중년 남자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산티아고를 여덟 번째 걷고 계시다고 했다.
본인이 다녀 본 여행지 중에 제일 좋은 것 같다고 자주 오신다고 했는데, 하루에 40킬로미터씩 걸으시다니 대단했다. 나는 이 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시간과 돈의 문제가 아니라 가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오면 좋을 걸 알지만 신경 써야 하는 다른 많은 문제들에 선뜻 가고자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
열심히 걷다가 무척 지쳤다.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엘부르고일 텐데.. 오늘은 그만 걷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을 따라갈 수 없이 혼자 남겨져야 할 시간이다.
벨시아노에 오니 마을 초입에 따로 떨어져 있는 알베르게가 보였다. 어제 묵었던 알베르게와 비슷한 분위기인 것 같은데, 알베르게 로비에 앉아있으니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해바라기가 그림 같았다. 오늘도 세명이서 묵는 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이번엔 노부부와 함께 지내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엘부르고까지 가는지 이 곳 숙소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나도 고민이 되었지만 이미 일정보다 빠르게 왔기에 멈춘 건데 아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 좀 더 갈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아무래도 베드 벅에 물린 것 같아서 가방 속에 있는 모든 옷과 침낭까지 빨아 널었다. 베드 벅 증세가 심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벌레에 물린 벌건 자국이 계속 생기는 게 두려웠다. 아직도 옷이나 침구 어딘가에 들어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순례자의 정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어제도 이와 비슷한 구성으로 먹었는데, 오늘은 홀로 만찬을 즐긴다.
숙소도 좋았고, 혼자 조용히 있는 것도 좋았지만 이 날은 많이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