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6 까리온 - 테라디오스 데 로스템플라이오스 26.6km
오늘은 까미노에서 가장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구간이 있는 날이다. 부르고스에서부터 메세타 구간의 시작이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17km 정도 마을 없이 계속되는 길을 걸어야 하는 다소 힘든 코스이다. 나는 서울에서 산티아고 길의 여러 구간을 찾아보면서 이 곳이 가장 걷고 싶었다. 끝없는 평야를 어지러워질 정도로 걸어보고 싶었다. 그냥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삶의 자리에 여러 문제들이 다 성가셨었기에.
물론 여름이라 뜨거운 태양을 피할 길이 없고, 몇 시간을 걸어도 똑같은 풍경의 지루함 때문에 부르고스-레온 구간을 뛰어넘고 가는 사람들도 많다. 메세타 구간을 건너뛰면 산티아고까지 다 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 구간을 걷고 싶어 뛰어넘지 않고 차라리 다음에 와서 뒷부분을 마저 걷기로 하고, 레온까지만 걷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렇게 걷고 싶어 온 것이었는데, 막상 여정의 끝이 다가오자 집중력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정이 들었고, 그들을 보내고 중도 하차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던 건지.. 아님 길은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 채 새로운 추억이 되레 쌓여 무거워진건지 오늘 그토록 걷고 싶던 길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어제 35킬로미터는 나에겐 좀 무리가 된 탓도 있어 어깨도 아프고, 몸이 많이 무거웠다. 그리고 오늘은 오전부터 무더웠다.
오늘은 남긴 사진이 많지 않다. 물론 산티아고 길에 올랐을 때 사진을 적극적으로 찍어 뭔가 남겨보자는 생각은 아니었다. 근데 삼십 대가 훌쩍 넘으니 어딘가 여행해도 지나면 쉽게 기억이 사라져 사진을 보고 나서야 그 감각과 기억이 떠오를 때가 많아졌기에 그래서 그 감각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게 된다. 하루에도 길 사진과 동영상을 수십 장 찍게 되었다. 핸드폰 저장용량도 거의 남아가질 않고, 액정도 파손돼서 핸드폰을 꺼내 들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오늘은 마냥 걸어보자. 사진으론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계속되는 구간이기에 오늘은 무조건 걷기만 해보자 는 마음으로 걸으니 좀 더 홀가분했다.
걷다가 드디어 한국인 30대 여성을 만났다. 30대는 처음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선글라스와 모자, 그리고 온몸을 꽁꽁 싸매서 햇빛에 타지 않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외국인들에겐 다소 수상한 복장처럼 보였는지 본인에게 왜 그리 꽁꽁 싸매고 걷냐고 많이들 물어봤다고 들었다. 나도 여기선 긴팔 긴바지를 자주 입었는데, 때때로 나시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멋지게 걷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어느 정도 더위에는 반팔 반바지가 괜찮지만,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쬘 때면 가릴 수밖에 없다. 한번 7부 바지를 입고 걸었다가 종아리 뒤편엔 김 무늬로 태닝이 잘 되었다. 한국에서 짐 쌀 때 여름 까미노용으론 어떤 차림을 입어야 하는지 많이 고민했었다. 다들 의견들이 달랐지만, 내 경우엔 반팔에 헐렁한 등산용 긴바지가 제일 걷기 편한 차림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온몸을 가린 여성분과 조금 같이 걷다가 드디어 나온 마을에서 쉬는 타임에 밥도 같이 먹으며 일정을 나누었다. 그녀는 중간에 버스를 탈 예정이라고 했다. 그녀는 얼음컵과 함께 에스프레소를 투샷 주문해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서 먹는 모습이 참으로 한국인답구나 싶었다. 이 곳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다. 그리고 커피는 서울이 더 맛있었던 거 같다.
레디고스에서 한 시간 정도 더 걸으니 템플라이요스에 도착하였다. 그 길이 무척 예뻤는데.. 어제에 비하면 짧은 구간이었지만, 땡볕에 걸었고, 오늘 무지 더워서인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마을 초입에 los templarios라는 곳의 숙소로 들어갔다. 꽤 깔끔하고 좋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이들 이 곳을 찾았지만 이미 자리가 다 차서 불가했다. 다른 숙소도 있었지만, 이 곳이 특히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일행 없이 혼자 도착해서 다행히 이 곳에서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산볼에서도 그렇고 난 참 운이 좋다 고 생각했는데.. 방배정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마 방들이 이미 차서 세 명이서 쓰는 방을 준 거 같은데 남자 둘에 여자 나 한 명... 남자 두 분이랑 같이 방을 쓰다니.. 그것도 2층 침대가 아닌 베드 세 개가 나란히 놓인 곳을 쓰려니 여간 어색하고 불편하고 약간 무서웠다. 다행인 건 좀 나이 많은 아저씨 한 명과 젊은 청년 한 명이 있는데 둘도 전혀 모르는 사이여서 셋다 어색한 거 같아서 다행이랄까.. 뭔가 하룻밤만 잘 버티자는 마음으로. 그 방을 그냥 쓰기로 했다. 다른선택의 여지가 없고.. 깔끔하고 식당도 좋고..
저녁에는 부산 친구들과 우연히 숙소 식당에서 만나서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이 친구들은 일정이 빡빡해서 이제 하루에 40킬로씩은 걸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난 빨리 걸을 이유가 없어서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 식사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부르고스 정도쯤에서 이제 못 볼 줄 알았는데, 꽤 오랫동안 동행 아닌 동행을 했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이 친구들과 여러 번 같이 밥을 먹었다. 어린 동생들이고, 부산 사투리가 어쩐지 살갑게 느껴지는 것이 친근했는데, 이제 못 본다고 생각하니 많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산티아고까지 걷고, 피에스테라와 포르투갈 여행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다소 부담되는 일정에 발을 절뚝거리면서도 일정을 늦추길 포기할 수 없어 열심히 걷고 있었다. 고생스럽긴 해도 셋이서 참 잊지 못할 여행일 것 같다. 아직 취업 전 막역한 친구들과의 여행이라니 얼마나 좋을까.. 아무래도 마지막일 거 같아 카톡 친구를 맺으며 서울에 와서 연락하면 밥 사 준다고 했는데, 아마도 느낌상 이 친구들에게 연락 올 일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3일만 걸으면 끝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리고 다소 불편한 방의 상황에 잠이 잘 오지 않는데, 갑자기 몸이 뭔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팔을 더듬어보니.. 그래 어제부터였는지 뭔가 물렸던 것도 같은데 하나둘씩 더 생겨나는 것 같은 기분. 불을 켜고 침대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다들 자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한참 뒤척이다 침낭과 옷으로 꽁꽁 다시 몸을 싸매고 잠들었다. 베드 벅이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