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 이떼로 라 베가-까리온 로스 꼰데스 35km
오늘은 순례길에 와서 가장 많은 거리를 걸은 날이다. 메세타 지역쯤 오면 사람들이 체력도 붙고, 평지이기 때문에 전보다 많이 걷게 된다. 나와 비슷하게 출발하고, 자주 보던 친구들이 점점 더 앞서가는 것에 아쉬움을 느껴 오늘은 속도를 좀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5일 정도 더 걸으면 계획한 여정이 끝이 난다. 올 때부터 끝까지 걷기로 한 게 아니고, 걸을 수 있을 만큼 걷자고 생각했던 게 레온까지 였다. 레온까지 걸으면 450km 정도 걸은 셈이다. 서울에서 부산 정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잘 해낸 거지만. 산티아고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을 깊이 남기게 한다. 오늘은 정말 많이 걷고 싶었다. 더워지면 힘들지만 걷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것 같다.
오늘 굉장히 많은 길을 걸었는데, 아름다운 구간들이 참 많았다. 순례길의 대부분 모든 길이 좋았지만, 특히나 마음에 남는 구간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프로미스타로 가는 길이었다.
프로미스타로 가다 보면 수로길이 나온다. 물가를 걷는 길. 물가 옆으로 추수가 끝나 잘 정돈된 황금색 밀밭이 보인다. 이불을 잘 개어 놓고, 방금 청소를 마친 방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그사이에 수로 옆길을 걷는데, 아침 무렵이라서인지 그곳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불어오는 바람사이를 걷다 보니.. 어쩐지 김동률의 잔향이라는 곡이 떠올랐다.. 뒤에 다른 사람들도 걸어오고 있었지만. 그림 속에 혼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이 곳은 빨리 걸어가기가 아쉬웠다. 오늘 계획상 많은 길을 걸어야 하기에 이 곳도 빠르게 지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잠시 멈추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프로미스타를 지나 여러 길을 빠르게 지나갔다. 꽤 넓은 도로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사진을 찍고 바로 핸드폰을 떨어뜨려 버렸다. 아이폰 액정을 한 번도 깨 본적이 없었는데, 액정에 금이 나무 가지 모양으로 갈라져버렸다. 다행인 건 액정이 아예 나가거나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사진은 좀 덜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리를 지나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걷는다. 도로와 함께 나 있는 길이라 차가 지나갈 땐 조심스럽다. 이곳도. 무척 아름다웠다. 노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꽃길 사이로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비현실적인 길.. 누자베스 음악을 들으며 이 길을 걸었다. 행복하고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혼자인 게 편하다.. 단체생활을 좋아하고 사람들과도 잘 지냈지만, 그 속에서도 혼자 있는 편이어서 내가 늘 외로워 보이는가 아님 진짜 외로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곳에 와보니 더 잘 알겠다. 혼자서 이 길을 즐기는 게 너무 좋았다.. 물론 길을 오래가다 보면 사람들이 그립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전반적으로 혼자서 길을 걷는 것이 좋았다.
언제쯤 혼자인 자신을 버리고 사람들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관계는 늘 어렵다.. 예민하고 주변에 눈치를 많이 봐서 인 것 같다. 서울에선 그게 참 스트레스였다. 핑계 같기도 하지만 일에 대한 도전과 열정도 관계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자꾸만 위축되어갔다.
길을 걷는 것은 힘들어도 그냥 걸으면 되니까..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으니까..
오늘은 여정이 길어서 중간중간 많이 쉬었다. 고요하고 평온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에 들려 맥주 한잔 하기도 하고..
길 가다 들린 알베르게 겸 바에서 파는 순례자 정식이 정말 맛있었다. 1일 1 볼로네제인 듯. 그리고 닭고기 스튜도 정말 맛있었다. 그리곤 다시 걷는다. 또 걷는다. 35킬로미터는 정말 길긴 했다.
2km남았다는 표시. 저기 까리온이 보이는데.. 코 앞에 있는 것 같아도 2km는 눈에보이듯 금세 도착하는 거리가 아니었다.
거의 세 시 좀 못 되어서 얼굴이 벌게지고 녹초가 되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까리온은 생각보다 컸다. 내가 선택한 알베르게는 좀 특이하게 2층 침대는 없고 1층 침대만 쓰는 수녀원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건데.... 배정받은 침대 양 사이드에 외국인 아저씨들 두 분이 쓰셔서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침대와 침대 사이 간격이 생각보다 좁았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나 아저씨 두 분이 계셔서 정면을 바라보고 잠들어야 했다.
방안에 있는 것이 답답해져서 동네 주변을 돌아다녔다. 일본인 미와를 만나 같이 마트에 들렸다오는데, 참새 친구를 다시 만났다. 이 곳에 와서 친구들과 맥주 한잔 하며 회포를 푸는 중이었다. 참새 친구가 술이 좀 거하게 취했는지 나와 미와를 보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다며.. 한국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며..
취해서 감정이 더 올라온 탓이겠지만, 한동안 외국인 친구들 틈에서만 걷는 생활을 하다 보니 한국이 그리웠나 보다. 걷는 것도 그녀의 체력으로는 힘겨웠을 거다.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 같아 부러웠는데, 그래도 아직 어린 친구라 뭔가 외로웠을 마음을 생각하니 짠해졌다.
나는 누군가를 달래주거나 안아주는 스타일이 아니라 당황했지만, 미와의 권유로 어거지로 안고 토닥여 주었다. 이런걸 영 어색해하는 나도 참 미숙하다. 참새친구의 마음이 좀 진정되고, 하나의 해프닝으로 잘 넘길 수 있었다. 미와와 귀여운 친구인 것 같다며 언니들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밤은 양 사이드 외국인 아저씨들의 코 고는 소리와 함께 잠들 수 있었다. 걸었던 길은 참 좋았지만, 나도 어쩐지 점점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