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걷기

Day 14 산볼- 이떼로 데 라베가 20km

by ㅇㅁ

어두운 새벽 부스럭거리기가 미안한 방에서 일찌감치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한두 명 일어나기 시작하니 거의 방안에 모든 사람들이 다들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직 컴컴한 밤이라 별을 보며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별도 별이지만 달이 무척 밝았다. 가로등을 하나 켜놓은 것 같았다. 밝은 달 때문에 홀로 걷는 길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 어젯밤은 무척 편안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한적하게 바람을 쐬던 시간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그곳을 뒤로 한채 오늘도 걷는다. 길이 참 좋았다 걷고, 아침 먹고 걷고, 풍경 보며 걷고, 생각하며 걷고, 만났던 사람들을 또 만나서 함께 걷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걷다 보니 제대로 된 마을이 하나 나왔다. 평지를 걷다 어쩐지 밑으로 푹 꺼지는 듯 숨어있는 온타나스.. 어제 산볼에서 묵지 않았다면 이곳까지 걸어야 했을 거다. 동이 터 오르는 새벽의 마을을 바라보니 아련한 마음이 든다.

여기서 산티아고까지 457킬로미터이다.. 나도 다 걸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욕심부리지 않고 걷자는 마음이 었는데 목적지가 다가오니 왜 일정을 이리 짰을까 다 걸을 순 없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오늘도 기나긴 여정. 굉장히 많은 곳을 지나쳤다. 이런 풍경은 이제 익숙하면서도 늘 다른 길이라는 것에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걷는다.

그렇게 마을 하나를 또 지난다.

그리고 걷다 보니 올라야 할 산이 하나 보인다. 저걸 내가 설마 넘어가는 건가 싶었는데, 넘는 거였다.

이쯤 지나는데, Y를 다시 만났다. 저번에 한번 같이 뒷모습 찍어주기를 했었는데, 이번에도 서로의 뒷샷을 찍어주고, 함께 산에 올랐다. 친절하고 착한 친구다. 산에 올라 전망을 바라보니 내가 저곳을 다 걸어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전망을 바라보며 쉬는데 또 다른 한국 여자 아이를 한 명 만났다. 작고 귀여운 참새 같은 친구였는데, 자기 체구만 한 엄청 큰 가방을 메고 팔과 다리를 온통 휘저으며 걸었다.. 유럽 친구들과 함께 다니는데 다른 친구들 체구가 너무 크고 무지 빨리 걸어서 그 친구들을 따라 함께 걸으려니 온몸을 휘저으며 걸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차부대처럼.. 돌진하는 속도가 대단했다.

외국 친구들과는 여기서 만나 친해진 모양이었다. 너무 좋은 추억과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 부러웠다.


나이가 든다고 별 다른 것도 하나 없는데, 왜 삶의 제약과 제한이 생기는 걸까. 어쩐지 책임이 무거워지고, 삶의 자리에 그냥 둬선 안될 것 같은 문제들이 자꾸 발생한다. 그런 것들을 다 제쳐 두고 이곳에 있을 땐 행복했지만, 돌아가면 여전히 문제들은 쌓여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들을 돌파할 마음을 좀 더 얻을 수 있겠지.

그렇게 산을 넘어가니 또다시 펼쳐지는 끝없는 벌판. 노란색이 해바라기 구역이다.

오다 중간에 산 니콜라스 성당에서 묵고 싶었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로만 생활하고, 세족식을 해주는 좀 특별한 분위기라던데.. 한참 뒤에 연다고 해서.. 다음에 나오는 마을에서 지내기로 했다. 좀 더 걷다가 커피색 강을 지나 이떼로 데 라베가 까지 왔다.


오늘은 라 모칠라라는 레스토랑 겸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아까 오다가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이 이 곳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여기서 오늘은 지내볼까 하고 왔는데,, 식당이 맛있고 좋았지만, 숙소가 좀 허술했다. 여기서 자도 되는 걸까 하는 찜찜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베드 벅 약도 없었기에..

밥을 먹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 나는 일기를 썼다. 이제는 오전에 걷기 점심에 밥 먹기를 하고 나니 오후 시간이 조금 여유로워지고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걷는 것에 익숙해졌다. 발목도 식도염도 거의 다 나은듯했고, 얼마든지 더 많이 걸을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

그리고 메세타 평원 지역은 아무래도 거의 평지다 보니 사람들도 추천 거리보다 더 많이 걷는 분위기였다. 더위만 피한다면 이제 30~40킬로는 걸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내일은 더 많이 걸어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