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권력이었다
돈
나에게 돈은 필요하고 원하는 물건, 서비스를 얻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 물물교환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필요한 것 이외에 원하는 게 있는데 돈이 모자랄 때, 가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다음으로 미루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이 말을 처음 들은 남편은 혼자 원시시대에 살고 있냐며 신기함 반, 비웃음 반을 보이며 재미있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물물교환의 의미를 뛰어넘는 돈의 사회적인 의미와 힘에 대해서 잘 안다. 진작에 알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돌아보면, 돈이 ‘~한 것이다’라는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데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집안어른들 영향인 것 같다.
한 친구는, 우리 집 얘기를 듣더니 조선시대 양반-돈이나 정치권력은 없지만 양반 정신을 지키는-이나 미국의 청교도 신자 느낌이 난다고 했다.
그 정도로 내가 고지식하고 보수적이고 세상 물정 모른다는 뜻이었을 거다. 사실, 그 친구 말은 틀리지 않다.
대부분 집안 어른들이 공무원, 선생님 같은 공직에 종사했고 사업가, 자영업자, 서비스 종사자는 ‘돈’에 양심, 자존심을 파는 사람들이라고 은근히 무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욕심내서 투자하거나 성공하려 애쓰기보다는 ‘안분지족’이나 ‘욕심 없는 삶’을 추구했고, 성공 욕구가 큰 사람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명절에 가족끼리 모이면 돈 얘기 하는 것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어른들끼리만 조용히 했겠지.
명절이 지나면 친구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얘기가 오갔다. 누가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집을 샀는지, 투자하다 망했는지 같은 이야기들. 난 저걸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어른들끼리 하는 얘길 들은 거겠지만.
친구들과는 다른 환경에서 살며, 나는 어른들의 돈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알게 모르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고 결혼생활을 하면서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현대사회에서 본 돈은 ‘권력‘이었다.
돈을 버는 사람보다 돈을 쓰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리한 요구도 당당하게 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사기업에 다녀서였을 것이다. 영업을 하지 않는 공직에서 일했더라면, 지금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가족 사이에서도 돈의 힘은 분명했다. 돈을 버는 사람은 존중받았고,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집안의 중심이 되었다.
어릴 때, 아빠들이 일하고 돈을 벌었으니 대우하고 떠받들어주는 분위기가 익숙하지만 난 ‘아빠‘라는 어른의 역할과 위치를 존중하는 걸로 이해했다. 그런 아빠가 돈까지 벌어오니까 더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 말이다.
그런데 결혼 후에 본 시댁은 너무 달랐다. 나이대가 우리 부모님과 비슷했어도 시댁 집안 여자들도 대부분 일을 했고 존중과 대우의 우선순위는 ‘경제활동을 하느냐 안 하느냐’였다. 심지어 출산 후, 육아를 하는 나에게도 눈치 아닌 눈치를 주었다.
처음엔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 눈에는 내가 못마땅한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저런 노력들을 했는데, 의외의 일로 그런 눈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아이 낳은 후, 건강이 안 좋아져서 집에만 있는 와중에 계속 이사를 하다 보니, 친정에서 안타까워하시며 집 구할 때 보태라며 목돈을 주신 적이 있다.
그 후로 시댁에서는… 내가 집에 있든 말든, 자주 찾아오든 말든 전혀 괘념치 않는 상황이 되었다. 이전에는 별것도 아닌 일에 수시로 하는 잔소리, 자주 오라는 연락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말이다.
그 이후로 난 돈의 힘을 다시 느꼈다. 그리고 시댁에서 눈치를 보는 대상은 내가 아닌, 우리 부모님이란 것도 알았다.
친정과 시댁이 판매자-소비자 관계는 아니지만, 결국, 상대적으로 돈을 더 쓸 수 있는 사람 앞에선 몸을 사리고 조심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흐름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렇다면, 돈 있는 사람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그 정도에 대한 인식 차이가 갑질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예전에는 돈이 그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돈은 선택할 자유와 권력,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킬 힘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