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야, 깨어있느냐

지금, 여기, 왜

by 냉라면

휴직을 들어올 때, 부장님께서 직접 읽으시던 책 몇 권을 하사해 주셨다. 사실 신경 써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으나, 정작 내가 여유가 없어서 못 읽고 있었는데 요새 들어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이제서야 책을 펴보게 됐다(여유가 생기니 브런치에 자기 기록도 다시금 시작하게 됐고…). 법륜 스님의 책이라는 것만 알고 제목도 그냥 눈여겨보지 않은 채 책을 훑어봤는데, 그중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었다.




옛 선사 중에 자기 이름을 자기가 부르고 자기가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개야, 넌 지금 여기에 왜 왔니? 무엇하러 왔어?” 하면

“행자로 들어왔습니다.”라고 셀프 대답을 하고,

“너 지금 행자 노릇 잘하니?”라고 또 소리 내어 물어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남들의 온갖 모순은 한눈에 다 파악하면서도 정작 자기 모순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혐오를 일삼는 사람들을 욕하면서, 정작 내가 누군가를 혐오함은 알아채리지 못하거나 자기 합리화를 해버린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아 보호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남의 모순은 결과적인 행동을 먼저 보고, 나 자신의 모순은 의도를 기준으로 보게 되며 인지 부조화는 불편하기 때문에 자동으로 회피하게 되는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기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 책임이 생긴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어서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는 편한 선택을 해버리기도 하는데, 따라서 역설적으로 자기 모순을 인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스스로를 관찰하고 감정 분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자기 모순을 인지하지만, 오히려 “너무 너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거 아니야?”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십상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모순이 없는 사람은 없고, 중요한 것은 모순의 존재가 아니라 모순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모순을 인지하면 성장이 되고, 모순을 합리화하면 반복이 되며, 모순을 타인에게 투사하면 갈등이 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지금, 여기, 왜 이 세 가지에 늘 깨어 있으면 삶에 후회라는 건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여기, 왜는 자기 기만을 끊는 질문들이다. 변명과 서사를 끊고 사실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거와 미래에 매달리는 건 자기 합리화의 온상이다. 반면 “지금”을 묻는다는 것은 지금 내가 실제로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를 묻는다는 건 단순한 장소를 넘어 맥락을 묻는 것이다. 여기서, 이 상황에서, 이 사람 앞에서 나는 왜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물으며 내 적응 패턴과 행동에서의 자기 모순을 깨닫게 된다. “왜”를 묻는다는 것은 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강력한 질문이다.


지금, 여기, 왜라는 것에 셀프로 질문을 하고 셀프로 대답을 하다 보면 자기 모순을 알아차릴 수 있고, 이 자체가 이미 반쯤 해결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성인(聖人)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기만을 일삼지만, 늘 깨어 있는 것 자체로 덜 자기 기만적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인간관계에서나 자기 자신에게도 조금 덜 폭력적인 자세일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불교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 Presence도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뜻으로 생각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상태이고, Mindfulness(원래는 불교의 사띠)도 지금 일어나는 경험을 판단 없이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무명(無明)의 반대말인 각성도 결국 깨달음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Be sober and vigilant도 정신을 차리고 있으라는 의미다.


왜 시대마다, 문화마다 똑같이 ‘깨어 있으라’고 했을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정체성을 고정하고 감정에 납치되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특별한 경지가 아니라 유지해야 하는,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인 깨어 있음을 연습해야겠다. 글을 다 쓰고 책을 덮으니 비로소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여기 깨어 있기」.

작가의 이전글PTE 3. Reading & Liste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