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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May 03. 2021

자기만의 방

쓰기에도 투쟁이 필요할 줄이야

“여성이 글을 쓰려면 연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1927)


약 백 년 된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뼈저리게 와 닿는 요즘이다. 그녀로부터 백 년 뒤에 살고 있는 나는, 그래서 그녀보다 더 나은 글쓰기 환경을 지니고 있을까. 새삼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내 공간이 사라진 지는 좀 되었다. 이 년 전까지 서재는 나의 독차지였으나 코로나 이후 남편의 재택근무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남편은 자연스럽게 서재에 장비를 이것저것 들여놓았고, 나는 썰물처럼 주방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외주작업이 들어온 건 그즈음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인테리어 분야의 콘텐츠를 납품하는 일감을 운 좋게 따낼 수 있었다. 글을 쓰고 돈을 받다니! 출간을 포기하고 역시 나는 안되나 보다 자포자기하던 와중에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였다.


식탁에 노트북을 펴고 나름으로 열심히 작업을 했다. 처음 해보는 일인 데다 사전 정보수집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밤 열한 시 육퇴 후 작업을 시작해야 했기에 며칠 밤을 새우는 것도 예사였다. 잠이 올 때면 커피와 영양제 등 온갖 방법으로 잠을 쫓아내고 글을 완성해서 납품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어느 날은 남편이 물었다.

“그거 쓰고 얼마 받는댔지?”

“0만 원 정도?”

“지금 사흘 밤을 새우고 그거밖에 안 받는다고? 우리 팀에서 매뉴얼을 쓰는 직원은 일당 두 배인데?”

스멀스멀 불쾌감이 올라왔다. 이 사람은 내가 이걸 얼마나 좋아서 하는지 모르는 걸까? 자신의 보수 기준에 못 미치는 일은 무가치한 것처럼 표현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 그는 시간당 사만 오천 원을 번다. 그에 비해 당시 나는 시간당 오천 원 꼴을 받고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따질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써야 했다. 그 사건은 그저 어색한 미소로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 월 초에 다른 통로로 일이 들어왔다. 나는 이번에도 식탁에 노트북을 펼치고 꽉 막힌 글을 뚫으려 기나긴 곡괭이질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게 문제였다. 남편의 데스크탑이 고장 나서 저녁이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하던 게임을 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나는 글 작업에 노트북이 필요했고, 남편은 습관으로 굳어진 LOL를 하기 위해 노트북이 필요했다. 시급 오천 원짜리 인간의 ‘일’과 시급 사만 오천 원짜리 인간의 ‘휴식’ 중에 어느 것이 더 우선일까. 그 답을 알지 못해서 우린 진탕 싸웠다. 어린아이처럼 “이거 내 거야! 내 돈으로 샀잖아!”, “아니야, 내가 먼저 쓰고 있었잖아!” 같은 말을 하며 엉엉 울고불고 싸웠다.


얌전히 노트북을 양보하고 남편의 편의를 위해 내조하여 그의 시급을 올리는 게 맞지 않을까. 그게 가정경제 발전을 위한 쉽고 빠른 길이 아닐까, 하는 계산도 해봤다. 그의 말대로 최저시급조차 못 미치는 일을 하는 것보단 그냥 육아에 집중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계산에는 ‘나의 행복’이 빠져 있다. 가족이라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엄마의 행복은 무시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나의 행복을 나만이라도 챙겨야 했다. 결국 노트북을 쟁취해냈다.


너무 쉽게 무시되는 엄마의 존엄과 행복을 스스로 챙겨줬으면 한다. 설사 그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엄마가 가족에게 관심을 쏟는 만큼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아이의 엄마, 남편의 아내이기 이전에 가졌던 내 고유의 취향을 꼭 지워야만 우리는 좋은 엄마로 남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가족을 참아주는 것이 진정 오래갈 행복일까? 적어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가족의 행복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비록 한두 시간 잠시 열렸다 사라지는 식탁 위의 간이 작업실이지만, 그게 나를 채워주고 가족을 돌볼 힘 또한 줄 테니.


그래서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가족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좀 더 길게 함께 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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