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 Hana Mar 11. 2022

대선 이후, 계절은 입추

2008년을 생각하면서

대선 이후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 어제는 쇠고기를 듬뿍 사서 고깃국을 끓여 먹었다. 속을 달래는 국물 요리를 삼시세끼 챙겨 먹는다. 오늘은 미루던 한의원에도 다녀왔다. 한약 냄새 솔솔 풍기는 따끈한 침대에 누워 한차례 앞뒤로 침을 맞고 나니, 마음도 몸도 몽글몽글 해졌다. 이제야 좀, 제정신이 든다.


사람은 낮은 곳에 있을 때 힘을 기른다.


우울증으로 십수 년을 고생한 나의 경험담이자,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에서, 인간사에서 무수한 예를 발견할 수 있는, 용감하게 말하자면 자연의 이치다. 속이 빈 비치볼을 물 밑으로 밀어 넣으면, 더 깊이 누를수록, 더 세차게 물 위로 차고 오른다. 튤립 같은 구근 식물은 해가 짧아지는 가을에 심어 추운 겨울을 온전히 흙에서 보낸 후에야, 이른 봄에 싹을 틔운다. 자신의 바닥을 성실하게 살아낸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부러지지 않을 단단한 등골을 기른다.


이번 대선으로 완결된 하나의 정치적 사이클에서 나에게 계절 상 입추에 해당하는 경험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였다. 유모차 부대도 나왔고, 넥타이 부대도 등장했었다. 밤새 세종로 주변에서 사람 구경, 컨테이너 구경을 하며 친구들과 어슬렁 거리다가 이른 아침, 집에 가기가 아쉬워 덕수궁 앞 횡단보도를 무한정 반복해서 건너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한 무리는 덕수궁 쪽에서, 다른 한 무리는 시청 앞 광장에서 빨간 불에는 기다리고, 초록 불에는 행진하며 ‘헌법 제1조’ 노래를 끝도 없이 불렀다.


한 달, 두 달 시위가 계속되었지만, 막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게 시위대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MBC를 징계했고, 그놈의 미국산 소고기를 기어이 수입했다. 지금에야 찾아보지만, 촛불의 배후에 ‘친노세력’이 있다는 판단이 박연차 회장 세무조사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사도 있다. 처음에는 퇴임 후 전직 대통령이 불행한 말로를 맞는 운명을 바꿔보려 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촛불집회를 겪은 후 ‘친노세력’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1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입추를 맞는다.

그 뒤로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다 수의를 입었고, 윤석열 당선인은 선거 운동할 때부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적폐 청산 수사’를 하겠다고 공언을 했다. 지나간 사이클에서 어떤 테마가 반복되고, 어느 부분에 변주가 일어날지, 섣부른 추측은 피하고 싶지만, 불안한 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나마 나름대로 믿는 구석은, 보수 정권을 지내며 쌓은 사람들의 저력이 더 나은 진보 정권을 만드는 거름이 되었다는 것.


사람은 낮은 곳에서 힘을 기른다.

옳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 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될 때, 낮은 곳에서 촛불을 드는 사람들을 믿는다.

앞으로 5년, 2027년까지,

낮은 곳에서, 힘을 기른다.  




윤석열 ‘적폐 수사’ 발언 ‘패착’으로 보는 보수 언론의 시선, 미디어오늘, 2022, 02, 24.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2278


[MB권력 5년 막후] #8. ‘대군’들의 밀약, 촛불에 한 줌 재로 사라져. 시사저널 2013, 09, 04.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028


작가의 이전글 외할머니의 기도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