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스포일러 주의
<봄날은 간다>는 재관람입니다
슬슬 푹푹 찌기 시작하는 6월입니다. 시험치고 시간이 남아 몇 편의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안녕, 용문객잔> 까지도 이 리스트에 있을 뻔하였으나 시간이 없어 관람을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전 세계의 가수들 중 내 최애의 보이스는 바로 비요크다. 서울 인구의 10%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사는 작은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북유럽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목소리에 한 아름 머금고 있다. 체코에서 넘어온 이민자 '셀마' 를 연기하게 된 비요크는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관객의 심장을 비수로 꿰뚫는 듯한 놀라운 연기를 선보여 주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장점만큼이나 단점이 명확한 인물로 아직 필모그래피 전체를 일독하진 못하였지만 그의 긴 영화역사에서도 <어둠 속의 댄서> 만큼 그가 예술가로서 가진 모든 한계가 민망할 정도로 낱낱이 드러나는 이른바 '악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폰 트리에를 만나게 되면 물어보고 싶다 "이런 서사가 어떤 영화적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했습니까?" 유치할 정도로 어거지인 여성 수난극과 그 비극성을 돋보이기 위해 구겨넣은 싸구려 케이크 빛깔의 뮤지컬 넘버는 심히 거북스럽다. 라스 폰 트리에는 분명 그 해에 자신이 황금종려상을 받을 것이라는 오만에 가까운 확신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예술 영화로서의 접근 혹은 대중 영화로서의 접근 모두의 종착지는 이 영화의 공허함과 지루하고 긴 러닝타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것이다.
분명 순수하고 여리여리한 비요크의 목소리와 혼신을 다한 절정의 연기는 그 곡조로 말미암아 조롱과 냉소로 가득 찬 감독의 자아를 비집고 나와 보는 이를 감동시키겠으나, 그런 비요크와 트리에의 정체성 싸움마저 결국 폰 트리에가 계획한 영양가 없는 산제물 화형식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날 매우 언짢게 한다. 폰 트리에!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셀마의 몸뚱아리까지 보여주면서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가? 허둥지둥 셀마가 미쳐 다 부르지 못한 노랫말을 자막에 적어서 무마하려는 것은 다 부질없다. 라스 폰 트리에 특유의 재수없음이 가장 유치하고도 가증스럽게 드러나는 졸작이라고 생각한다. 비요크에 대한 나의 애정으로나마 끝까지 보기는 성공했다.
키스 없는 연애극을 써야 하는 일, 여든 다섯 번 웃겨도 웃음을 참아야 하는 일… 제국주의와 사상통제 아래 예술가들은 펜을 꺾고 최전선에서 총알을 받게 된다.
각본이 상당히 재치 있고 훌륭해서 그런지 영화도 맛깔난다. 감독의 영화 기본기가 매우 탄탄함을 여실히 느껴볼 수 있다. 특히 이 영화 햇빛을 너무 잘 쓴다. 세트가 좁은 방 자연광 하나 비치는 창문이 전부인데 상황의 여러 가지 느낌들을 얼굴 두 개랑 햇살 길게 늘어진 복도로 변주해내는게 대단하다. 그리고 주연들의 명연까지! 야쿠쇼 코지는 정말 세계적인 명배우 반열에 들 만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일이 오히려 예술에겐 재기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 물론 예술 검열에 대한 풍자이지만 난 이것이 좌절하고 주저앉은 예술학도들에게 던지는 쓴소리가 아닐까 싶다. 키스 한 번 극본에 못 넣어도, 꼭 경찰서장을 등장시켜야만 해도, 저렇게 재치 있는 각본을 쓸 수 있었다구! 점점 질 좋은 작품이 끊기고 그나마 있던 지원도 툭툭 끊기고 있는 2024년의 한국 영화계는 <웃음의 대학> 처럼 예술가엔 절망의 시기가 아닐까 한다.
요즘 영화인들의 신세 한탄과 푸념이 점점 많이 들려오고 있다. 사람들은 영화 대신 오티티와 유튜브로 고개를 돌렸고 한 편에 만 사천원이 넘는 영화는 구시대의 오락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미타니 코키는 외친다. 고난의 시대는 되려 예술가를 위한 독무대라고! 주저앉기 보단 펜을 한 번 더 잡을 힘을 내라고. 연출이 좀 신파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와닿는 비율이 더 높았던 것 같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지만 예술가들이여, 제국주의를 찬양하면서도 걸작을 쓸 수 있다!!
한국영화의 아름다움. 그리고 한국영화만의 아름다움. 물론, 후반부의 할머니(치매가 있는)가 “뻐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게 아니야” 라는 대사를 친다던지, 그녀가 떠난 힘든 날에 더해 할머니가 꽃저고리를 곱게 입고 영원한 외출을 떠나신다던지 하는 전개는 작위적이었다. 착오 뒤엔 항상 성장이 있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런 당위성으로 당신 혹은 나의 분명한 '잘못'이 실수로 어물쩡 넘어가 버릴수는 없다. 내가 우디 앨런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 를 흠모하는 이유는 실패가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성찰적인 진중함 덕분이다. 치히로는 터널을 빠져나가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알비 싱어는 “그래도 우린 결국 계란이 필요하지 않나요” 라는 수줍은 자기고백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가 칭찬을 받는 부분인 권태와 이별 그리고 후회와 성장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는 큰 감흥을 못 느꼈다(근데 유지태가 차 끌고 이영애 집 앞에서 밤 새면서 창문 쳐다보는 장면에선 좀 놀랐다. 그건 나도 많이 하던 부류의 짓이어서ㅋㅋ…). 그러나 딱 헤어지는 장면 직전까지는 너무 훌륭했다. 영화가 강릉 대숲 속 산사에서 울려퍼지는 나른한 종소리처럼 명상적이고 고요했다. 2000년대 한국 영화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이런 한국적인 차분함과 수수한 기쁨을 나는 몹시 사랑한다. <봄날은 간다>는 한국 영화 중에서도 촬영 아름답기로는 둘째가라는 게 서러울 정도로 쇼트 한 장 한 장이 결이 무척 곱다. 허진호 감독이 이런 비주얼리스트였다는 게 놀라웠다. 친구 택시 얻어타고 강릉까지 가는 그 장면의 연청색과 보라빛 사이의 하늘빛은 <라라랜드>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리따웠으며 한국영화에 대한 내 자부심을 한 층 끌어올려주었다.
그리고 이영애 님과 유지태 님 정말 훌륭한 배우들이다. 정말 배우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다시 느껴본다. 역시 배우들은 마스크가 되어야 한다. 영화의 분위기랑 너무 잘 어울렸다. 실제 저런 연인이 강릉과 서울 사이 어딘가에 있었을 것 같다. 벚꽃 흩날리는 날 잡았던 손의 온기를 추억하며 다시 대숲으로 들어가는 유지태의 모습은 그 성장의 작위성을 조금은 희석시켜준다. 당신도 언젠간 강릉까지 가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공감과 아름다운 촬영 그리고 음악만이 이 영화의 성취가 아니었을까 한다. 분명한 잘못이 낭만화되는 건 원치 않는다. 난 그렇게 합리화 하고 싶진 않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 공식. 독특한 필터 예쁜 여배우 그리고 사랑 이야기. 이와이 슌지는 정말 여배우를 너무나 예쁘게 화면에 담아냅니다. 물론 피사체가 애초에 훌륭하니(ㅎㅎ) 그런 것이겠습니다만 특별히 그의 영화 속 일본의 여배우들은 보석같이 반짝입니다. 냉혹하고 지적인 시네필의 세계에 순정만화적인 감각으로 접근했던 그의 영화는 뉴웨이브도 지나간 흐름이 된 지금에선 되려 독특해 보입니다.
<아멜리에>와도 비슷한 맥락인 위 작품은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타입입니다. 저는 영화에서 꼭 무슨 일이 벌어져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여서 일상의 리듬을 스케치하는 영화도 무척 좋아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고전 영화를 보러 가고 짝사랑 하는 선배가 일하는 책방에 매일같이 또박또박 들르는 단아한 하루의 반복이 꽤 괜찮았습니다. 이런 리듬을 아는 사람과 평생을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군요.
그러나 제가 이런 일본식 순정 감성을 백 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특유의 비현실성에 있습니다. 저런 예쁜 여주가 저렇게 촌시런 남주를 왜 그렇게까지 짝사랑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와이 슌지는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 사람 같습니다. 왠지 그는 하늘하늘하고 예쁜 여심저격 영화를 만들 것 같지만 그것은 굉장한 오산이라는게 제 의견입니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입니다.
여배우가 정말 와 소리만 나올 정도로 아름답게(그리고 강박적이게) 담아지는 것은 그가 남성 작가로서 지닌 어떠한 한계와 강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성 캐릭터의 평면성과 몰개성으로 드러나죠. 어떻게 그의 연애영화에는 <러브 레터>도 그렇고 한결같이 여주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만 들게 할 뿐인 남자들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러브 레터>는 맨스플레인이 지독하리만치 드러나는데 이것 또한 너무 싫습니다). 일본엔 잘생긴 남자가 없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가 신카이 마코토를 위시한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들하고도 궤를 같이 하는 단점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의 구성적인 완성도를 그렇게까지는 높게 평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본에서 4월이 갖는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찐한 여운이라던지, 주인공의 세련된 코디 등등은 패션과 화창한 날씨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동참하는데 마다하지 않을 것들입니다. 춥고 쓸쓸한 홋카이도와 사랑이 시작되는 따뜻한 도쿄의 공간적 대비도 인상적입니다. 언젠간 홋카이도를 꼭 가보고 싶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더 그 마음이 확고해졌네요. <블루 발렌타인> 처럼 삼사월 봄비에 잘 어울리는 영화였습니다.
유년 시절엔 대체 왜 어른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을까요? 엄마에게 버림받아 고모에게 맡겨진 어린 두 자매를 다룬 영화인 <나무 없는 산>은 제가 보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올해의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많은 생각이 들어서 문제입니다. 그래도 간략하게 적는 컨셉이니만큼 몇 개의 단상들을 옮겨보겠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두 아이들에게 빨리 성년의 시기가 도래했으면 하는 바램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딱히 엄마가 보고싶어지지 않는 나이로 아이들이 도망쳐 버렸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잔혹한 유년은 너무나 느립니다. 또 그들은 천장에서 무언가를 꺼내기엔 키가 너무 작았습니다. 허구한 날 소주를 끼고 사는(이 묘사가 너무나 리얼했기에 탄식을 금치 못했습니다)고모에게 의지를 '해야만 하는' 유년의 비루함이 날 너무나 세게 두드렸습니다. 나도 그렇게 어린 날들에게 얻어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은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바보같은 인간들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됨을 체득했지만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그 당연한 진리가 아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왜 알 수 없었는지요. 어른들의 색안경을 껴야만 보이는 실용적인 지혜들을 엄마가 준 저금통에 동전을 넣느라 미처 보지 못하는 그런 묘사가 날 눈물나게 했습니다.
왓챠 코멘트에 "저 아이들이 좋은교육에서 멀어지는 걸 걱정하는 나는 역시 속물이다"라는 코멘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리플을 남겼습니다. 솔직히 저도 보며 그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강인하고 우직하게 시골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보지만 "쟤넨 그래서 수능 어떻게 치지?"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시종일관 울렸습니다. 21세기인 만큼 그들이 현대사회에서 멀어지는 것도, 출세와 성공으로부터 단절되는 것도 일종의 학대가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본을 사랑하고 학벌을 중시하며 세련된 입신을 강조하는 것을 나쁘게는 보지 않는 인간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초딩 때부터 학원을 열 개씩 보내며 전문항 5지선다 쓰레기 시험지의 더미에서 아이들이 힘겹게 숨쉬는 것을 물론 원치 않지만, "우리 애는 학원 안 보낼 거에요~" 라며 자식이 명확한 계획이나 진로 없이 퍼질러져 있는 것을 달관하는 부모상도 매우 싫어합니다. 누구든 태어난 이상 열심히 살아보는 연습을 해야하고 그것의 가장 쉬운 형태는 공부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진이과 빈이가 차라리 고아원으로 가서 어떻게든 공부를 하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 지 모르곘네요.
내가 살면서 가장 신기한 것은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물질 혹은 사상을 갈구하고 욕망하는 것에 대한 매체의 묘사에는 익숙했지만 인간이 같은 인간의 인격 혹은 성을 탐하는 것에 대한 묘사는 꽤 어색하고 비릿하게 느껴진다. 차이밍량의 <하류>는 일체의 음악 없이 2시간 가까이 포르노그라피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갱생 연습을 지루하게 현시한다.
주인공 이강생의 알 수 없는 목 통증 그리고 배관공도 못 고치는 누수는 관객에게 처음엔 별 것 아닌 것 처럼 느껴지지만 마지막 어머니의 허탈한 침수와 근친상간에 다다러서야 그 중대함이 비로소 들어난다. 영화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물의 이미지처럼 건조하고 출구 없는 삶에서 비롯되는 극단성, 억눌린 욕구의 표출이 또 하나의 다른 일상처럼 보이는 듯 하다가 이내 터져버리고 만다. 어머니는 수도꼭지를 뒤늦게야 수도꼭지를 잠가보지만 갈 데까지 간 목의 통증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게이 사우나를 드나드는 아버지와 포르노그라피 업자를 애인으로 둔 어머니는 설정 자체가 꽤 충격적이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아들뻘 되는 남자의 구강 성교를 원하고 어머니는 교성만이 진동하는 포르노 테이프를 틀고 잠들어버린 무심한 애인에게 사랑을 달라고 앵겨본다. 잠 자고 싶음 자고 먹고 싶음 먹지만(영화 속 이강생의 부모님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먹는다) 섹스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욕구의 본원적 성질이 불공평해진다. 섹스 결핍과 소외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강생과 부모는 각자의 뒤틀린 발산을 발생시킨다.
그러한 단발적인 성욕의 발산과 충족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기다란 멍함은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낙수처럼 그들의 삶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누구든 그렇게 이유없이 차오르는 이상한 공허감 혹은 결핍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섹스를 하고 싶지만 절대로 그것을 할 수가 없게 된다. 허락되지 않는 자들에겐 영원히 허락되지 않는 욕구에 대해 나는 어떤 접근을 해야할 것인가. 그 결과 인류는 포르노그라피를 발명해냈고 수건 아래에 묻었을 정액에서 비롯된, 그리고 벌어진 철판과 수도꼭지 사이로 쏟아지는 그 박탈감과 무기력함은 어느덧 여름 장마처럼 물밀듯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차이밍량은 이강생이 아니었으면 자신도 평범한 극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영화는 지루하고, 느리며, 일체의 음악도 없는 건조함의 최극단에 위치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촉촉하게 적시는 시뻘건 애수와 슬픔이 묻어나오는 듯 했다. 그러나 인상적인 숏들과 조명, 이강생의 울림있는 연기, 지워지지 않는 외상에 대한 탁월한 묘사는 이 영화를 단지 심심한 아트하우스가 아닌 걸작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하다. 차이밍량의 다음 영화 <안녕 용문객잔>이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