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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안 Mar 30. 2021

중년 인생, 쉼표가 필요할 때

세대공감이야기


어쩌다 보니 중년이 되었다. 

나이 40 중반.



직장과 가정이라는 사회적 시간을 살아내는 동안, 주어진 역할에 책임을 다하려 부단히 애쓰며 살았다.    

 

어떤 이는 인생은 고통이라 말하고, 다른 이는 인생을 부지런히 사는 것이라 말하며, 또 다른 이는 그럼에도 살아지는 것이고, 이왕이면 즐기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을 돌이켜 보면 살아지긴 하는데,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애쓰며 살았다.

어린 시절엔 부모님 속상하게 하지 않으려 애썼고,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잘 지내려고, 직장생활 때는 상사에게 인정받고 아래 직원들과 잘 지내려 애썼다. 열심히 살아냈지만,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하고 후회가 남아 있다. 무엇인가에 속상하고 원망하는 마음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나 보다.     



난 왜 애쓰며 살았을까?          







어머님은 종종 내가 집안 대청소를 하거나, 명절이나 가족행사로 며칠 동안 음식을 만들고 나면 짧고 간결하게 “그래, 참 애썼다”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친정 부모님이나 직장 상사 어느 누구한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 칭찬인지 격려인지 모를 이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참 헷갈렸었다.    

 

어느 날, 어머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던 중 이 말이 나에게 까지 전해 내려오게 된 그 유래를 포착할 수 있었다. 하기 싫었을 텐데 열심히 노력했다며 근면, 성실, 책임을 다한 며느리의 태도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하는 어르신 세대의 소통 언어였다는 것을. 맞다. 그땐 그랬다.

요즘 말인 대박, 짱과 같은 의미지만, 라떼의 전유물이다.  *라떼: "나 때는 말이야~"를 지칭하는 요즘 말

      


칭찬이라 생각하고 그냥 들어 두어도 되었을 텐데.... 나는 이 말이 왜 불편했을까?’               








10년 전 어느 가을, 기어 다니기 시작한 둘째 아이를 돌보다 이유식을 만들고 어른 식사를 챙기느라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거실 소파에 누워 가을 코트를 판매하는 홈쇼핑을 보고 계신 어머님이 코트가 어떤지,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묻고 주문해달라고 하셨다. 이 시기의 어머님은 화초 돌보기와 소파에 누워 TV보기를 즐겨하셨다. 


나를 챙기는 건 고사하고 아이들 돌보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식사에 부모님 욕구까지 돌봐드려야 하는 내 현실이 비참하고 원망스러웠다. 손자 낳아주고 집안일까지 챙기는 식모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 자신과 회사 업무만 챙기며 살 수 있었던 직장생활과 판이하게 달랐다. 어머님의 편안한 마님 같은 모습을 불편하게 느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참 편해 보인다고....' 




친정부모님은 소 한 마리를 시내로 끌고 나와 신혼을 차리고 억척같이 살아내 자수성가하셨다. 종갓집 맏며느리, 워킹맘, 아이 셋을 키워냈다. 어릴 적 엄마는 11남매의 첫 딸로 살림밑천이라 학교도 보내지 않고 집안 일과 오빠, 동생을 돌보는 일을 하며 자랐다고 한다. 학교에 가서 앉아있으면 외할머니한테 머리채 붙들여 집에 오곤 했다고 한다. 그래도, 간신히 초등학교는 졸업해서 글은 읽고 쓰신다. 엄마는 이런 자신을 가여워 하지만, 실수를 할 때면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자책을 하신다. 지금의 엄마는 몸의 통증과 싸우며 노후를 살고 계신다. 


어릴 적 나에게 "너는 엄마처럼 고생하면서 살지 말여. 나처럼 못 배우고 죽어라 일만 하면서 살지 말여. 사업하는 사람 말고 대기업 다니고, 막내한테 시집가서 편하게 살아야 혀. 알갔지?. 엄마 말 들어야 고생 안혀

희생으로 점철된 엄마의 인생을 가엽게 느꼈다. 그리곤,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결심하며 살았다. 엄마의 인생을 가치 없게 바라보는 내 마음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서울 도심 처녀로 배 농사를 하는 시골 총각을 만나 힘든 시댁 살이를 하셨다고 한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배 농사를 하는 동안, 집에는 시부모님 친구와 친척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양로원이자 친인척 펜션이었단다. 농사를 짓는 일꾼들과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모두 만들어서 대접해야 했단다. 지금은 살기 좋은 편리해진 세상이라고 자신은 너무 고생하며 살았다고 당신을 가여워하신다. 그런 자신을 알아달라고 라떼시절 이야기를 나에게 날마다 들려주셨다. 애쓰며 고생한 어머님의 중년 인생처럼 나도 고생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님은 한 때, 몸이 아파 수술에 병원을 전전하며 사셨지만 지금은 관리만 하며 편안하게 사신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건, 노년을 편하게 보내는 어머님처럼도 살고 싶지 않다는 거다.

자유를 갈망하는 나는 희생이 강요되는 순간들이 오면 항상 마음의 홍역을 치렀다. ‘당신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속으로 결심했다. 그러곤 어느 날,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은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그럼, 난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어느 날, 명상과 마음공부로 어떤 생각과 감정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만났다. 그전까지, 고통을 느끼는 마음으로 현실에 저항하며 참 애쓰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 자신의 깊은 욕구를 이해하고 나서야 이 불편한 감정들이 모두 해소되었다.   



내 욕구는 친정 부모님에게서 인생을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균형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어머님에게서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찾으라는 신호를 보내준다. 어르신들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방향성을 온몸으로 보여주신다. 

자유롭게 살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은 삶의 이상이 있었다는 것을 양가 부모님을 보며 발견하였다. 양가 부모님에게서 불편했던 내 마음들을 살펴보며 결국 나를 알아간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달콤한 사탕을 손에 쥐어 주듯 

인생은 내가 갈망하는 대로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생의 쉼표를 찍으며 깨닫게 된다.



내가 그동안 애써 왔던 건나를 자유롭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보다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는 나, 그런 인생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마음으로 꽁꽁 싸매며 이 마음을 숨기려고 애쓴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속상하고 내가 나를 원망했던 것일 게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애쓰며 살아온지도 몰랐던 나에게, 따뜻한 온기를 지닌 자유로움과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은 나에게, 오는 줄도 모르고 휙 지나칠 수 있었을 중년의 나에게, 이제 자유롭고 편안한 나 자신으로 살라고 인생의 쉼표를 선물한다.     


‘애쓰며 살아온 마음아! 그동안 애썼고 견뎌내며 참 잘 살아왔구나.’     

어머님이 나에게 해주신 짧고 간결한 그 말씀은 진정 나에게 필요했던 말이었다.

인생에 이런 수수께끼가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라떼의 말이 전해질 때마다 어머님을 꼰대라고 여겼었다.    

 

오해가 이해로 바뀌며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중년 인생에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처 풀지 못한 수많은 오해들로 넘쳐난다. 내 마음속엔 켜켜이 쌓인 채 숨어 있다가 적절한 상황에 불편으로 다가온다. 따뜻한 온기를 지닌 자유로운 노년을 위해 살려고 애쓰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 쉼표의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다.







쉼표는 숫자 9를 닮았다.

1에서 9까지 열심히 달려왔다면, 10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쉬어가라는 뜻이다.

9에서도 잠시 머물지 않고 10, 11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사람은 

12도 구경 못하고 지쳐 주저앉고 만다. 쉼표에 인색하지 마라.

쉼표를 찍을 줄 아는 사람만이 마침표까지 찍을 수 있다.  

   

- 정철, 머리를 9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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