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직후, 이번에도 나는 아이의 겨울 방학을 맞아 한 달간의 발리 여행을 계획해 두었다. 아이가 커서 독박육아의 부담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언제나 더 바빠질 미래가 기다리는 남편의 부재를 견디는 방법으로 여전히 내게는 여행이 최고이자 최선.
원래도 자주 사람을 만나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 전에 정리해두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부러 더욱 한가롭게 1월을 보내는 중 새해 첫 약속으로 내가 늘 힘을 얻는 언니들과의 만남이 정해졌다. 그리고 만남 후 돌아오는 길, 나는 앞으로 신년 초엔 무조건 언니들을 만나야 하나 싶었을 만큼 돌아오는 길 내내 가슴이 방방 떠 어쩔 줄 모르겠을 정도로 힘을 얻어왔다.
언니들은 뭐랄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가졌던 윗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정말 벗어나는 사람들이다. 특히 언니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요컨대 어떤 나이대나 상황에 깨달아질 것들을 알려주기보다, 그 시간에 내가 닿기까지 기다려준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내가 잘하고 있는 것들은 칭찬해 주고, 연약해 보이는 구석에 대해서는 판단이 아닌 심지를 단단히 할 수 있는 위로를 준다. 이런 언니들과 만나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상 어디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커진다. 배울 점이 있는 어른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단언컨대 내 주변에서 누구보다 큰 사람들이다.
이 날 특히 내가 큰 힘을 얻었던 건, 나와 우리 집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가장 연륜 있는 언니가 해준 말이었다.
"내가 네 남편을 만나게 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깃발이 화려하게 나부낄 수 있는 건 깃대가 붙들고 있기 때문인데, 당신 아내가 깃대 같은 사람이라고."
가장 먼저 든 마음은 언니의 표현력에 대한 감탄. 그리고 뒤이어, 언젠가 꼭 책 한 권 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감탄하는 언니의 말이 수식하는 대상이 나라는 데 큰 감동이 일었다.
언니의 말에 동의한다기보다, 그 말에 오랫동안 힘을 얻고 싶어 일기장에 끼적이다 문득 내가 요즘 감동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감사를 넘어 감동이라고 느끼는 지점이 많은 요즘. 왜인가 생각해 보니, 예전에 느끼지 못한 걸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예전에 느꼈던 것의 가치가 더 깊이 보이는 덕분 같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이 마음으로 내가 올 한 해를 버티기를.
사실 나는 올해 처음으로, 새로운 해를 적어 내리며 아무 감흥이 느껴지지 않아 그것 자체가 되려 신기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는데 낯섦도 익숙함도 없는, 그 사실 자체가 신기한 새해.
생각해 보면 '새해엔 이걸 해보고 싶다, 저걸 이루고 싶다'라는 생각들이, 어떤 바람이나 희망 같은 것들이 아무리 꾹꾹 눌러도 튀어나와 버렸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게 놓인 모양이다. 나쁘게 말하면 기대가 없는 것인데 나는 그게 썩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물론 새해에 새로운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것 자체보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며 조금 서글프긴 했다. 예컨대, 아이유의 ‘이름에게’와 같은 노래를 들으며 나도 잊힐 이름들 중 하나로 살다 가겠구나라는 생각 끝에 드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삶이 싫고 무의미하진 않다. 남편과 갈등이 절정을 치닿던 육아초기에 '넌 적어도 네 이름으로 살잖아. 난 내 이름으로 살지 못한다고!'라며 소리 지르던 지난날의 나를 생각하면, 삶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어느 정도 장착된 기분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정말이지 몇 년 사이 나는 아내로서 남편을 내조하고, 엄마로서 아이를 양육하는데 필요한 마음이 내게 생겼다는 걸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마음을 끼적이며 눈물이 차오르는 걸 누르는 노력이 좀 필요한 것을 보면 다 버렸다고는 못하겠다. 일상이 흔들릴 만큼의 방황은 지나왔다고 정리하는 게 맞겠다. 그게 어딘가. 당당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징징대기만 했던 때를 생각하면 말이다.
이런 생각이 오고 가는 날, 때마침 나와 대화가 고파 연락을 해오는 몇몇 사람들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생각했다.
'이 생에 내게 주어진 역할이 여기까지 일 수 있잖아. 그 삶이 뭐 어때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만 준비되면, 내 삶에 대해서도 감동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올해 나는 그 마음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다짐 하나만 가져보려 한다. 아까와 달리 눈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마음에 이른걸 보니 이게 맞는 것 같다. 역시 비워내는 것이 답이구나.
잘했다, 오늘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