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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Feb 29. 2024

희망과 절망 그 사이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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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어 시간쯤 잤을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머리에 이런저런 말들이 둥둥 떠올라 잠이 오지 않았다. 시차적응을 무사히 해내는 게 마치 여행의 마지막 미션 같아 눈을 감고 한 시간쯤 뒤척이다 문득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니, 때마침 언제 봐도 아름다운 일출이 상공에 펼쳐지고 있었다.


 어린 날의 나는, 아니 불과 몇 년 전의 나는 이런 광경에 희망을 가장한 지극히 이기적인 소망을 곱씹곤 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내 여행과 나 자신이 떳떳하지 못해 무어라도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떠오르는 태양이 문득 내 눈앞에 나타나 준 게 마치 나와 내 여행이 쭉 이어져도 된다는 허락이라도 되는 양 희망에 찬 감상을 읊어댄 거다.


 그러던 내가 1~2년 사이에 좀 변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아픔을 거칠 만큼 거치는 사이 희망이든 절망이든 적정선 이상으로 치고 오르려는 걸 애써 누르는 연습을 했더니, 노력 없이 곧장 이런 마음이 튀어나온다.


 '앞으로 내 삶에 기막힌 반전은 없을 거야'


 어쩌면 나는 보통의 사람보다 조금 오래 소녀의 마음을 갖고 산 것일지 모른다. 내가 정말 소녀였던 시절에 꾸었던 꿈이 실패한 뒤로 쭉 나는 그 모양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그 사이를 메우고 살았는지도. 그리고 마침내 인생이 주는 가르침에 따라 나는 여기, 적당한 포기와 적당한 기대를 품고 사는 지경 언저리쯤 와 있는 듯도 하다. 기막힌 반전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나를 슬프게 하지 않은 게, 되려 그 사실을 덤덤히 곱씹을 줄 알게 된 것 같아 반가운 마음.


 그렇다고 아무 설렘 없이 여행을 지나오진 않았다. 이전의 여느 여행들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이유들로, 예컨대 피사에서의 극적인 상황이나 집 앞 카페 직원들의 친절, 느지막이 알아보고 찾은 놀라울 정도로 친절한 에어비앤비 주인집에서의 2주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나는 내게 처한 현실의 상황과 별개로 감동했으니. 그리고 생각했다. 극적으로 해결될 턱이 없는 이 현실을 잘 통과해 나갈 수 있는 힘은, 내가 그 한 문제를 내 삶 전체의 것으로 보지 않는데서 나오리라고. 누군가의 말마따나 '이런 상황에서' 기어코 여행을 떠나온 덕분에 나는 삶과 문제를 동일시하지 않는 마음을 얻었다.


 이 여행 중 멈추지 않고 귓속을 맴돌던 말이 있다. 내 힘을 키워주는 건 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여행이었다는 것. 정말이지 나는 이제 더 이상 여행을 의심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지금 기쁜 이유는, 그 내용이 아닌 그 내용을 읊는 흔들림 없이 고요한 내 마음 때문이다.


 매일 뜨는 해처럼 나는 매일 나로서 내 삶을 살리라 다짐해 본다. 아직 ‘언저리‘에 닿았다는 핑계로 하나 바란다면, 따뜻하게 모여 웃을 수 있는 연말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모자란 내 힘을 채워줄 시간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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