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선 순둥이, 집에선 서열 1위 일진짱

첫 번째 모난 마음

by 편린

“밖으로는 유약하게, 안으로는 강건하게 살아가세요. 그래야 운이 풀립니다.”


23년도 한겨울 새해 즈음이었나. 샤머니즘의 세계에 푹 빠져 보이지 않는 운명을 이리저리 점치던 시절, 용하다던 사주 선생님께서 내게 건넨 조언이었다. 그 짧고 굵은 한마디에 뜨끔한 마음이 가슴 한 켠에 어찌나 뜨끈하게 번지던지. 사실 나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그리 살아가고 있었다. 어떨 때는 스스로 정신이 분열된 게 아닌가 하는 물음이 따라붙어 괴롭게 질척일 정도로. 친구와 애인을 대하는 행동과 부모님을 대하는 행동은 서로 잔뜩이나 유리된 채 언제나 내 안에서 피 터지는 영역 다툼을 벌였고, 무뚝뚝한 독불 장녀를 한평생 외사랑 하며 살아온 부모님은 살갑고도 친절한 내 사회적 자아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일전에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성보라 역을 바라보며 많은 것들을 반추한 적이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내 모습을 이리 거울처럼 바라본 적은 없었는데. 가족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표현에 서툴러 부모님이 걱정될 때면 도리어 애꿎은 짜증을 부리는 모습이 꼭 나 같았다. 얼음장 같은 벽을 높다랗게 친 채 서늘하게 부모님을 타박하는 모습이. 한쪽으로 굳센 경상도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 그랬을까. 나의 냉기 어린 태도는 부모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좀처럼 따라잡질 못했다. 그 사이에 벌어진 간극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아득히 멀어져만 갔고, 어느새 몇 바퀴를 돌고 돌아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져 버렸다. 그렇게 나는 예민하고 차가운 딸로 자라나, 성인이 되어서도 한참 동안이나 부모님께 못되게 굴었다. 애인과 친구에게는 언제나 애교 넘치는 행동과 상냥한 말투로 세상 따스한 온기를 전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특히나 엄마에게는 그 투정이 더 심했다. 나와 꼭 닮은 엄마. 똑같은 성격, 추진력, 예민함, 감성을 지닌 우리는 애증의 관계 속에서 얼기설기 얽힌 채 살아왔다. 그 누구보다도 친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많이 다퉜다. 나는 엄마의 덜렁거림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고, 내게 항상 건네는 건설적인 엄마의 조언마저도 나를 옭아매려는 족쇄일 거라 여겼다. 늘 ‘내가 알아서 하겠다’라는 퉁명스러운 말을 되뇌며 엄마에게 저만치 거리를 두었다. 그런 엄마는 가끔씩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혹여 못되게 굴까 하는 노파심을 늘어놓곤 하셨는데, 내 살갑디 살가운 바깥의 모습을 보시면 아마도 많이 놀라셨겠지. 엄마와 나의 신경전은 아마도 죽기 전까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걱정하는 이 기이한 마음이 어느새부터는 버겁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일들은 어느 날 두둥 하고 해결책이 등장해 생각보다 쉽게 풀리곤 했는데, 이 문제는 스무 살 성인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오래도록 나를 괴롭혀왔으니. 누구보다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는데, 그 시절에 대한 대답이 이런 내 태도라는 것에 스스로가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그 원인에 대해 일일이 따져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굳이 캐보자면 항상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중압감에 사로잡힌 K-장녀로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했다.


그런데 최근 퇴사를 하고, 남는 시간마다 부모님의 일들을 돕기 시작하며 간과하고 있던 것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업장 안에서 대표님인 어머니는 많은 직원들을 통솔하며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고, 사업장 밖에서도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 어딜 가나 어머니를 멋지게 생각하는 사람들 투성이였고, 모두에게 멋진 그런 엄마를 감히 나만 제멋대로 대했던 거였다. 사실 엄마는 사실 덜렁거리는 게 아니라 우리를 먹여 살리느라 그동안 너무나도 바빴기에 모든 걸 일일이 챙길 수 없는 거였고, 훌륭한 엄마가 내게 건넨 조언들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삶의 교훈이었다. 어쩌면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상냥하고 부드러운 딸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조언을 뼛속 깊이 새겨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고, 아직은 친구나 애인에게 하듯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한다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행동으로 성실히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멋대로 판단하지 않고,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파장을 존경하기. 유순한 첫째 딸이 되어 귀염둥이 둘째 딸 못지않게 다정히 부모님을 대하는 방식을 열심히 수행하는 나날이다. 조용히 바뀌어가는 나를 부끄럽게도 알아챈 부모님께서도 요즘 왜 이리 부쩍 착해졌냐며 칭찬 일색이다. 내가 원래부터 순둥이었다고 하면 믿지 않으시겠지. 고집스런 기세를 밀어붙이던 독불 장녀가 이제는 다정다감하면서도 든든한 맏딸이 되었으니, 가정에도 더 많은 평안이 찾아들기를 바란다.


뒤죽박죽 엉켜있던 식순지를 이제야 조금씩 바로잡고 있다. 서른을 두어 달 앞둔 지금, 이제 밖으로는 강건하게, 안으로는 유약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내 부드러운 물성을 한없이 내보이고, 나를 지켜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단단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다. 사주 아저씨의 말씀, 그것 좀 거스르면 어떠한가. 그리하여 내 부모님께서 한결 푹신해진 나를 발판 삼아 사회에 나가서는 집안에서보다 더 튼튼하게 살아가실 수만 있다면, 나는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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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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