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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작가 Jan 14. 2024

역사:숙종에게 희생된 여인, 장옥정

숙종의 피의 정치

"다시는 궁녀에서 왕비까지 올라올 수 없게 하여라."


숙종이 장희빈을 떠올리며 한 말입니다

조선의 수 많은 역사 중 궁녀 출신의 여인이 

정실 왕비까지 올라간 일은 장희빈이 유일무이였습니다

어떻게 궁녀였던 장희빈은 정실 왕비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제 19대 왕 숙종이 집권했던 시기는 다른 왕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조선왕조를 뒤돌아보면 치열한 당파 싸움에 

골머리를 앓는 왕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숙종이 집권하던 조선은 달랐습니다 

숙종의 성격은 워낙 다혈질에다가 냉혹한 면모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물론이며 어머니인 명성왕후 조차도 

자신의 아들인 숙종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전, 오후, 저녁에 따라 성격이 바뀌니 이를 어찌할 방법이 없다."


라고 했으며, 인현왕후에게


"감정이 불과 같아 누군가 옆에서 부채질을 한다면 큰 재앙이 될 것이오."


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성격이 겉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또한 숙종은 그러한 자신의 성격을 잘 보여주듯 

집권 시기에는 3번의 환국이 있었으며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수렴청정도 없이 친정을 했다는 점에서 

숙종의 어떠한 사람인지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인들을 정치의 희생양으로 이용했다는 점이 

그를 역사 속 잔옥한 왕으로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숙종에게도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요

바로 첫번째 부인이었던 인경왕후가 죽었을 때 입니다

숙종이 11살이 되던 해, 왕실에서는 서인 출신인 인경왕후를 

숙종의 짝으로 맺어주게 됩니다

명성왕후도 서인 출신이었고 그때 당시 조선 조정은 

서인이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인경왕후가 두 명의 딸을 낳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딸은 모두 죽게 되고 

인경왕후 마저도 그 당시 무시무시했던 천연두에 걸려 

1680년에 20살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는 성격이 엄격하고 단호해 

숙종이 다른 여인에게 한 눈을 파는 경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첫번째 부인인 인경왕후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숙종은 크나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잿빛인 날들을 살아갈 무렵 

길을 거닐다 한 여인을 보게 되는데

그 여인의 미모가 실로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린 숙종은 시간이 흘러도 

그녀가 눈 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녀를 잊지 못해 뒷조사를 하게 된 숙종은

그녀의 이름은 장옥정이며

남인세력의 잘나가는 재벌가 딸이자 후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 장희빈의 미모에 대해서는 실록에서도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이니 (실록 기록에는 여리와 장옥정이 유일) 

미모가 어느정도인지 굳이 표현을 하지 않아도 

장옥정이 빼어난 절세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장옥정의 미모에 헤어나오지 못한 숙종은 

장옥정이라는 한 여인이자 궁녀에게 푹 빠지게 됩니다


1674년에 갑인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해 조정은 남인이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갑인예송이란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차례의 걸친 논쟁이었습니다

결국 복제는 기년상(만 일년이 되는 날)으로 정해지고 정권은 허적을 비롯한

남인에게 기울었습니다

그렇기에 서인들은 매일 같이 칼을 갈며 

자신들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장옥정의 등장이었습니다 

왕의 총애에다가 남인 재벌가의 딸이었던 장옥정에게는 무서울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남인들의 당당한 기세는 꺽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680년 남인의 기세가 사그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야사에 의하면 그해 3월 영의정 허적이 조부 허참이 시호를 받은 것을 기념해

잔치를 열었으나, 갑작스레 비가 내리자 옷이 젖는 것을 싫어해 

궁궐의 유악(기름을 먹인 천막)을 무단으로 가져다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영의정이라는 자신의 지위와 국왕의 신임을 믿고 

이같은 행동을 벌였을 걸로 추측이 됩니다

그러나 이 사사로운 사건은 아주 크게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숙종도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영의정이 떠올라 

그에게 유악을 가져다 줄 것을 명했는데,

이미 그가 유악을 멋대로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대노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숙종과 영의정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 둘은 언제든지 사이가 나빠질 수 있는 조짐으로 보였습니다


숙종은 병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하던 시기에 

아주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요, 바로 삼복의 변입니다.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복선군과 결탁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을 1680년 4월 5일날 듣게 됩니다 

숙종에게는 남인과 종친이 연류된 사건이라 쉽게 넘어갈 수 가 없었습니다

숙종은 자신의 성격과 원칙대로 두 주모자인 복선군과 허견을 

4월 12일에 사형에 쳐했으며, 

이 사건과 연관된 다른 사람은 사사나 유배를 보냈습니다.

또한 남인의 핵심 인물인 허적과 윤휴가 사사되었으며

그후 훈련대장 겸 총융사로 병권을 장악했던 유혁연 마저 사약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남인 세력의 중요 인물이 추풍낙엽으로 사라지자 

남인은 크게 흔들렸고 

곧바로 주요 관직들은 바로 서인으로 대체 되었으며 

숙종은 다시 송시열을 불러 최상의 예우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남인이었던 장옥정도 이 사건에 덩달아 내쫓기게 됩니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해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명성왕후가 궁녀이자 남인 세력이었던 장옥정을 

아니곱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궁내에 한차례의 피바람이 불고, 

자신이 사랑하던 장옥정 마저도 눈앞에서 사라지니 

숙종은 마음 한구석이 쓰라려 왔습니다

아무리 왕이어도 명성왕후가 살아있는 한 

남인세력에다가 후궁인 장옥정을 명분도 없이 

혼자만으로 불러들이는 건 힘들었습니다

그새를 놓칠리 없던 명성왕후는 장옥정의 빈자리를 의식해 

인경왕후가 죽은 지 3개월 만에 새 왕비를 간택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금혼령을 내린지 7일 만에 간택을 실시하고, 

20일 만에 삼간택을 실시해 이듬해 1681년, 

숙종은 서인 세력이었던 민유중의 딸 계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인현왕후가 됩니다

혼례 후 숙종은 당시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해메게 됩니다. 

그러자 평소 무속 신앙을 신봉했던 명성왕후는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벌을 서야 한다." 


라는 무당의 계시에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삿갓과 속옷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다가 그만 지독한 독감에 걸려 1683년 12월에 사망하고 맙니다

조정에서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 무당을 처형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숙종은 그 무당을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됐습니다

그리고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연모하는 장옥정을 찾게됩니다


"숙종 12년 12월 10일,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내전이 임금을 위해 그 일을 말하였

고, 자의전도 또한 힘써 그 일을 권하니, 임금이 곧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숙종은 명성왕후의 담제(상제 뒤 1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를 치루고 

대략 2월에서 4월 26일 이전에 장옥정을 궁으로 불러드렸습니다.

장옥정은 6년 만에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으나, 

왕실의 웃어른인 장렬왕후의(인조의 계비) 신임과 숙종의 총애 덕에 

그녀의 입지와 위세는 인현왕후와 바로 맞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인이 집권하는 상황에 서인 출신인 인현왕후를 마주쳐도 

기세가 꺽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니

장옥정의 당당함과 기세는 금세 조정안에 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장희빈은 얼마만큼이나 기세가 당당했을까요?

어느날, 숙종이 장옥정을 희롱하려고 하자 장씨는 숙종을 피해 내전으로 도망쳐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옥정은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이런 짓을 벌였다고 유추되고 있습니다

서인들에게는 장옥정의 모습이 왕이 나를 찾지 못하고는 못배기는데 

너희들의 심정은 어떠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 상황에 질투심과 성이 났지만 인현왕후는 장옥정에게 


"마땅히 전교를 잘 받들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장희빈의 태도는 교만함과 공손함을 갖추지 않았으며

웃어른이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장씨의 모습에

결국 내전은 장희빈을 불러 종아리를 때려 벌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장옥정은 내전과 서인에 대해 원한을 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남인의 힘은 꺾여있는 상태였고 

장옥정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숙종 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혼자 원한을 품는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바로 그녀가 숙종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겁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인현왕후는 결국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자

불안함과 긴장감을 놓치 못합니다


인현왕후의 걱정을 한시름 들어 놓을 방법은 

오직 뱃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후궁의 자식이기에 

인현왕후가 우려하는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들이면 당연히 숙종이 좋아해 할 것이 두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마 뒤 서인들에게 대거 충격을 주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바로 장옥정이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첫 아들을 품에 안은 숙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며

장옥정이 대견하며 둘사이는 더욱 애틋해졌습니다



이 소식은 궁궐 밖에까지 퍼졌고 

소식을 들은 장옥정의 모친이 

자신의 딸을 보기 위해 가마를 타고 입궁 하게 되는 데

이때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 소유들이 모친이 타고 있는 가마를

무참히 부숴버리는 일을 저지릅니다

소유들이 가마를 부섰던 이유는 장옥정의 모친이 

정 3품 이상 관리의 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유들은 원칙대로 가마를 부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숙종의 귀에까지 도달하게 되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숙종은 소유들은 전부 때려죽이라고 명합니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신하들이 말려 겨우 숙종의 화를 잠재웠지만

이미 소유들 중 2명은 고문 중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결국 신하들은 이 일을 계기로 숙종에게 질책과 문제를 삼았고

자신이 생각해도 소유를 처벌할 명분이 없었다는 걸 

깨달은 숙종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끝까지 자신을 말리며 문제 삼은 신하들을 칭찬하며 

그 일로 피해를 본 소유들에게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내적으로 서인들이 장옥정과 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의심이 남아있었습니다

결국 숙종은 후궁 출신의 장옥정이 낳은 아들의 원호를 정하게 되었고

신하들은 대거 반발하게 됩니다.

이는 숙종이 후궁의 자식을 공식 후계자인 왕세자로 지정하겠다는 뜻과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남인 세력에다가 서출이 왕세자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서인들은 집단으로 반발했습니다.


"후궁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원호를 정해준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며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부디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때, 말로는 어디든 지지 않았던 송시열을 필두로 

김만중 등 서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숙종에게 뜻을 거두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신하들의 뜻을 무시한 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강경했습니다


"그대들의 뜻은 잘 알겠으나, 

이렇게까지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보오"


숙종은 매번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혔으나, 

이 모든 상황이 잘못 됐다라고 생각하던 송시열이

원호를 정하는 일이 끝난 뒤에도 

강경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또 다시 올렸습니다.

결국 송시열의 상소에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 숙종은 

마치 계획했다는 듯이 이 일을 계기로 서인들을 대거 숙청하게 됩니다

마침내 송시열을 포함한 20명 이상의 서인들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떠나게 되었며 현재 관직에서 파직 됐습니다

이 일이 바로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 입니다

그리고 서인 세력이었던 인현왕후의 자리도 위험해졌습니다

인현왕후는 자식도 없었으며 서인들이 대거 숙청당하고 있는 상황에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바로 숙종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국상 기간이었던 중에

숙종은 신하들에게 중전의 탄일문안을 생략하라고 어명했습니다.


"국상 기간 중에 탄일문안을 하는 것은 불경하니 생략하라."


하지만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대거 높은 관직의 신하들이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탄일문안과 국상은 다른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숙종의 말을 무시한 채 인현왕후에게 문안을 드렸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크게 잘못이 없었던 신하들은 숙종에게 말하길


"대체 왕후의 탄일문안은 당연한 예법인데 

이렇게 화를 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상소를 올렸고 

자신의 어명을 무시했으며 심기 거슬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

숙종은 결국 인현왕후를 폐비로 내려 앉히게 됩니다

이렇게 거물급 서인 세력들이 무너지며 

핵심이었던 인현왕후마저도 폐비가 되니

조정은 자연스레 남인들의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근데 여기서 웃긴건 남인세력들이 조정을 장악했지만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남인 세력들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서인들과 같이 숙종에게 계속해서 반대하는 의견을 냈으며

남인들은 인현왕후에게 직접 찾아가 


"곧 예법에 따라 상황이 바뀔 것이니 진정하시지요." 


라고 뜻을 전했지만


숙종은 남인, 서인을 불문하고 모든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자신의 고집을 끝까지 밀어 붙였습니다

여기서 일부 학자들은 숙종이 장옥정과 아들을 이용해

장기집권을 막고 거슬렸던 서인 세력들을

몰아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숙종의 나이는 그 당시 28세였으며

인현왕후도 젊고 혈기왕성해서 

언제든지 아들이 태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보가 꼬일 수 있는 상황에서 

원호를 정한다는 것은

숙종의 계획과 생각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송시열과 김수항을 사사했다는 점이

언제든지 눈에 거슬리는 신하들은 

자신들의 목 앞에 칼날을 들이댈 수 있다고

경고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송시열과 김수항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송시열은 효종, 현종의 스승이자 서인 산림의 영수였습니다.

이런 분을 사사를 한다는 것은 

조선의 사상으로는써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숙종에게는 그것을 떠나 

제대로 자신만의 정치를 보여주겠다는 뜻이 더욱 컸습니다

또한 김수항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대사헌 김상헌의 손자였습니다

심지어 1680년에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강원도 철원에 있던 김수항은

생각지도 못한 영의정에 임명되어 급하게 수도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들어온지 9년 만에 

기사환국으로 피를 보게 되고 

진도로 유배까지 떠나 

결국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숙종은 세자 시절부터 

송시열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단순히 송시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해서

손쉽게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간간이 기회를 엿봤으며 

명분이 생기기를 기다렸습니다

제 아무리 한나라의 왕이라도 눈치가 보였다는 거죠

여기서 숙종은 송시열을 사사함으로써 

왕권 강화의 목표도 있었겠지만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문에 의한 

보복적인 감정도 있었습니다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자

송시열을 믿고 따르던 유생들과 신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끊임없는 상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숙종은 결국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모두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에 관한 상소문은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숙종은 

송시열을 불러다가 국문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멀었던 제주도에서 송시열을 다시 불렀습니다

한양으로 돌아가던 송시열은 이때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 중간마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합세해

길을 같이 했으며 

그 소문이 퍼지고 퍼져

송시열의 뜻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합세해

송시열을 따르는 이가 대략 5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숙종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송시열에 관한 상소문으로 스트레스인데 

송시열이 500명의 추종자와 함께

한양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은 

숙종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었습니다

이들이 뭉쳐서 또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결국 작은 불씨가 더 커지기전에 

꺼버려야한다고 생각한 숙종은

전라도 정읍에 있던 송시열에게 

사약을 보내 그를 사사 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길었던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송시열이 죽자 서인은 도미노처럼 무너졌으며 

저절로 남인은 민암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남인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는데요

기사환국에서 정확히 5년 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게 됩니다 

음력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한 밀고를 받게 됩니다


"대감 노론과 소론이 합심하여

민심을 불안케 하는 풍문을 퍼뜨리고 있으며

무언가 안 좋은 일을 꾸미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민암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민심을 불안케 하며 일을 꾸민다는 것이

역모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결국 민암은 이 일은 엄중한 사건이라 판단해

숙종에게 고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숙종은 분노하여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자를 잡아들이고

철저히 조사해 엄중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라고 공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2일 뒤, 3월 25일.

장옥정의 오라비인 장희재가 소론과 왕래한 

자신의 죄를 밝히며 잘못을 말했습니다

숙종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두려움에 떨었지만

숙종은 그를 되려 위로했으며 그와 동시에 뇌물 수수 혐의건도 

다음날 국문에서 부정되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노론과 소론, 

무인들이 대거 끌려와 취조를 받게 됐는데

여기서 무인 이시도가 한 말은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소론의 한중혁 부자가 남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남인들이 종실 의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무고를 하려고 했습니다."


라고 증언해


동편군이(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승선군의 장남)엮이게 됩니다

거기에다 숙종의 고모들까지 줄줄이 얽혀 들어갔으며

심지어 여동생인 명안공주의 유가족까지 얽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서인들은 정말 박살이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민암을 중심으로 한 남인 세력이

공주를 비롯해 서인들을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3월 29일 유생 서인 노론 김인이

오히려 민암을 중심으로 한 4명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역 고변을 하게 되고 

숙종은 잠시 혼란에 빠지는 듯 했지만

민암을 포함한 4명의 관리에게 괜찮다며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피를 볼까봐 두려움에 떨었던 남인들은

숙종의 위로에 안도했지만

4월 1일 국문에서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숙종이 비망기에 적은 내용을 말하자면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가 서로를 고하고

처형을 청하며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벼슬아치)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옥사를 주도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박탈하여

수도 밖으로 쫓아내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섬에

안치하도록 하여라."


그야말로 한 순간에 대반전 시나리오가 일어났습니다

남인들은 어안이 벙벙했으며 서인들은 환호했습니다

그야말로 희비가 격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로써 결국 남인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다시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남인들은 눈뜨고 코베인 상황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숙종은 폐비를 언급하는 자와

왕세자의 신위에 위협이 되는 발언을 하는 자는

무조건 대역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했습니다

숙종이 민암을 포함한 남인들을 위로 했던 3월 29일

그리고 숙종의 국문이 4월 1일

단 며칠 만에 숙종의 심경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숙종에게는 어떤 심경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아무래도 장옥정을 필두로 남인 세력의 힘이 점점 커지자 

숙종은 마음 한 편으로 남인들이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또 무엇보다 숙종은 장옥정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 못했습니다

숙종에게는 이미 다른 여인이 마음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인데요


바로 후궁 최씨였습니다

후궁 최씨는 훗날 숙빈 최씨로써 

바로 영조의 무한한 콤플렉스였던 영조의 모 였습니다

후궁 최씨는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 출신이었습니다

후궁 최씨는 7살 때 무수리로 궁에 들어와 

(혹 1681년 인현왕후를 따라 12살의 나이로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인현왕후를 섬기며 궁궐 생활을 했으나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장옥정이 왕비가 되자 

그녀에게 모진 구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야심한 밤에 숙종이 궐 내를 걷다가

한 여인이 방에 불을 켜놓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서

호기심이 생겨 다가가게 됩니다

후궁 최씨에게 다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자



"제가 한때 인현왕후를 모신 적이 있어, 마침 오늘이 생일이시라

기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기특하다고 느낀 숙종은 

그렇게 숙빈 최씨에게로 마음이 갔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최씨가 어느 날 밤,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숙종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만 최씨의 뒤태가 아름다워

그 자리에서 그녀를 불렀다고 합니다

아무튼, 숙종이 후궁 최씨에게 빠지게 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숙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자 질투심에 가득 찬 장옥정이

회임한 숙빈 최씨(후궁 최씨)를 잔혹하게 매질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것은 과장 된 것이며 회초리로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때린 정도였다고 합니다


장희재에게 괜찮다며 독려했던 숙종은 그 해 4월에 

장희재를 직권 남용이라는 죄를 물어 관직을 박탈하고

그를 한양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폐비 민씨의 서궁을 당장 옮기고 호위를 붙여서

늠료(봉급)도 내려주었으며

복위를 확정시키겠다는 명을 고했습니다

결국 1694년 4월 12일 삼불거를 언급하며 인현왕후를 복위시켰으며

궁 내에 왕비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숙종은 장옥정을 후궁의 지위인 희빈으로 격하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소론들은 결사반대를 합니다

인현왕후의 복위보다는 별궁으로 모셔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예우만 갖추면 된다고 주장했으며

장옥정이 왕후가 되는 것이 

옳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숙종은 전혀 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소론 중신들은 사직서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느낀 숙종은 

자신의 뜻을 한 수 접으려던 찰나

4월 17일 서인 소론의 영수 남구만이 이 일을 극적으로 중재시켰으며

또한 이듬해 1695년에는 1689년 기사 환국 때 죽거나

유배지에 간 송시열, 김수항, 김수흥 등의 관직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현왕후의 복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사면 당하거나, 죄인 대우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계속해서 소론들은 장옥정이 다시 희빈으로 격하된 것이 옳지 못하다며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줄 것을 청했으며

그녀를 동등이 높히거나

왕후의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왔는데요

1701년 무고의 옥이라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일은 길고도 길었던 환국과 사랑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됩니다

희빈으로 격하되자 장씨가 분노에 차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다시 중궁으로 복위하기를 기도했다는 증언을 

숙빈 최씨가 발고하게 됩니다

인현왕후는 시간이 지날수록 

양쪽 다리가 붓고 통증이 심했으며

다리에서부터 전신으로 경련이 일어났으며

결국 복위 8년 후인 1701년 (숙종27년) 

8월 14일 승하하고 말았습니다

인현왕후가 죽기 전 한 말에 따르면


"궁중 법도에 따르면 후궁 처소에 속한 궁녀들이 

내전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장희빈의 궁녀들이 

내전을 수시로 출입하였으며

창에 구멍을 내서동태를 엿보는 등의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지금 이렇게 몸이 아프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하는데

저 또한 이 상황이 의심스럽습니다."


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결국 대신들의 큰 비난과 

장희빈을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으며

결국 숙종은 장희빈에게 스스로 자결하도록 권했습니다

하지만 장희빈은 억울하다며 자기 아들의 병을 낫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공안이었을 뿐이라고 반론하지만

이미 숙종의 두 귀와 눈은 닫힌 지 오래였습니다

결국 숙종은 장희재와 동편군과 장씨 일파를

국문하여 처형시켰으며


1701년 10월 8일 그렇게 죽고 못 살았던 장희빈에게

자결하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렇게 장희빈은 억울한 눈물로 소복을 적시며

자결을 택했습니다

그 뒤에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서인이 주도하면서 이 환국의 난은 종결되게 됩니다


여담으로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자리에서 과격하게

거부하며 왕세자를 만나게 해달라며 저항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세자를 데려다 주니 이씨 왕실의 대를 끊어버리겠다며

왕세자의 생식기를 훼손시켰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장희빈의 공식적인 사망일은

10월 10일로 되어있습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10월 9일날

장희빈을 구면 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그 이후에는 숙종이 장희빈이 죽었으니

장례를 준비하라는 말만 있었다고 합니다

장희재는 10월 29일 한양으로 압송 돼

복주(형벌을 받아 죽다)당했으며

11월에 벌이 부족하다는 노론의 주장으로

시체가 능지처사 되었으며

후궁에서부터 왕비까지 올라갔던 

파란만장했던 장옥정의 기록도 여기서 끝이나게 됩니다

장희빈이 악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의하고

패자는 승자를 빛내기 위한 수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장희빈의 기록은 

그때 당시와 다를 수가 있습니다



https://youtu.be/g_Yhx3IA75M?si=HzSDiroWqaUXj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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